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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자'란 뜻의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서인도의 스페인 식민지와 함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1854년 미국 상원에서 캔자스주 신설 법안을 막으려 반대파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 정치적 의미로 쓰였다. 이후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의사진행을 고의 방해하는 행위를 뜻하게 됐다.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이름을 알린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이 국내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을 갈아치웠다. 장장 12시간 47분이다. 이전 기록은 2016년 테러방지법 입법 반대토론 때 이종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세운 12시간 31분이었다. 윤 의원은 대공수사권을 국가정보원에서 경찰로 넘기는 국정원법 개정안 처리를 막기 위해 연단에 섰다.

'철의 의원'으로도 불리는 그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마이크를 내려놔야 했다. 앞선 토론자 김병기 민주당 의원이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역상의 이유로 발언을 강제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동료 의원은 "윤 의원의 의지가 강해 돌발 변수가 없었다면 연설은 더 길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민주당은 당초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을 허용하기로 했다. 정부·여당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며 자당 의원들에게 맞불 토론에 나서도록 했다. 그런데 국민의힘 초선의원 전원이 참여하기로 하자 태도를 바꿨다. 민주당이 상정한 '토론종결 동의'는 찬성 180표로 통과됐다. 국회법상 재적 의원 5분의3(180명) 이상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를 끝낼 수 있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표결에 의해 필리버스터가 종료된 것은 처음이다. 민주당은 무제한 토론을 강제로 끝낸 뒤 곧바로 국가정보원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전체 의석수의 60% 이상을 점유한 절대 다수당의 위력시위다.

국회에서 처음 필리버스터를 시도한 인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1964년 야당 의원 시절, 동료인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의 구속을 저지하기 위해 무제한 토론을 실행했다. 원고도 없이 5시간 15분 발언해 김 의원의 구속동의안을 무산시켰다. 김 대통령이 계셨다면 토론을 강제종결한 민주당에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궁금하다. 반대는 자명(自明)했을 것이고, 지도부에 죽비를 내리쳤을지 모른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