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이나 정치지도자에게 대국민사과는 괴로운 일이다. 여론의 지지를 먹고 사는 처지에 전 국민을 향해 머리를 조아릴 형국이라면, 민심은 이미 돌아설 대로 돌아섰을테니 그렇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홍걸, 홍업 두 아들의 뇌물수수죄에 연달아 국민에게 사과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여론에 놀라서 두 차례나 대국민 사과를 한데 이어, 친형인 이상득의 불법정치자금 범죄에도 사과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세월호 참사에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잘하면 전화위복이 되고 못하면 더 큰 낭패를 당한다. 사과하고도 더 큰 비난을 받는 연예인들이 부지기수고 망한 기업들이 한둘이 아니다. 형용 모순에 가까운 '사과의 기술', '사과의 정석'이 회자되는 이유다. 기술과 정석이라지만 '문제 발생 즉시 사과하라', '진정으로 사과하라', '상대가 용서할 때까지 사과하라' 등등 사과의 사전적 뜻풀이에 가깝다. 정치인의 사과가 빛이 바래는 이유는 지연 사과, 대리 사과, 빈말 사과인 경우가 많아서다. 특히 선거를 전후한 당리당략형 사과는 신물 날 정도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다. 구속된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잘못은 집권당의 잘못이라며 "간절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지난 5월 광주를 찾아 5·18 희생자 묘역에 무릎 꿇고 "죄송하다"고 울먹이며 사죄한 장면에 비견할 만큼 감동적인 명문이다. 아쉬운 건 일독할 만한 명문장들이 사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 점이다. 사과문은 '2020년 12월15일 국민의힘'으로 끝나는데, 다수의 국민의힘 의원들은 사과에 반대하거나 불평한다. 여당의 비아냥이 아니더라도, 김종인 개인의 사과인지 제1야당의 공식 사과인지 국민들은 헷갈린다.
김 위원장이 대국민 사과를 결단한 건 범죄가 소명된 당 출신 전직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신생을 위해서일 것이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도 제1야당의 신생은 절실하다. 지방, 중앙, 입법권력을 독점한 1당 독주 정권은 두 날개로 날아야 할 민주주의에 위협적이다. 좌익의 건강을 위해서도 우익의 정상화는 절실하다. 야당 복원의 자양분인 정권 비판이 커진 지금이 호기이다.
그런데 우익 복원의 계기로 삼자던 대국민 사과 대열부터 흩어졌다. 우익 복원엔 기적 같은 행운이 필요할 듯 싶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태로운 외날개 비행은 계속될 모양이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