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조실부모 총명한 12세 관기
9년후 재회 오랜 연모의 마음 지녀
쇠약해진 율곡 걱정 밤중에 찾기도
그는 고마움에 밤늦도록 정담 나눠
그녀 위해 '유지사' 시문 유품 남겨
율곡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했다. 대과에 급제한 1564년 정6품으로 관직에 나선 후 여러 직을 거쳐 1583년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를 지어 바치고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1574년 39세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임지인 해주 관아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저녁상을 받는데 어린 동기가 따라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이 유지였다. 어려서 선비인 부친과 양가집 여인이었던 모친을 잃고 기적에 오른 관기로 열두 살이었다.
율곡은 총명한 유지를 귀여워해서 따뜻하게 대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가르쳤다. 율곡이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간 후에도 어린 기녀 유지는 율곡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율곡에게 유지라는 어린 기생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율곡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로 평양으로 가는 길에 해주 관아에 들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에 그의 침소로 유지가 찾아왔다. 그녀에게는 하늘이 내린 재회의 기회였다. 그녀는 몰라보게 성숙했고 아름다웠다. 연모의 마음을 오래도록 지니고 있던 그녀는 그 밤 율곡을 모시려 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율곡을 더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언제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이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이듬해 병약했던 율곡은 요양을 위해서 황주에 있는 누님 집에 가는 길에 해주에 들렀다. 연련이던 유지와 밤 깊도록 술잔을 나누며 그리움을 달랬지만 그녀를 품지는 않았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율곡은 황주에서 돌아와 해주 근처의 강마을에 머물며 요양을 하고 있었다. 유지는 쇠약해 보였던 율곡이 걱정되어 몇 밤을 뒤척이다 밤중에 밤고지로 율곡을 찾아갔다. 율곡이 별세하기 서너 달 전의 일이었다.
율곡은 사랑하는 여인이 찾아와 준 것이 고맙고 병든 몸이 원망스러웠다. 가까스로 그녀와 밤 이슥토록 정담을 나누었다. 율곡은 이 밤이 가면 다시는 유지를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힘겹게 붓을 들었다. 그녀를 위해 문장을 쓰고 시를 지어 유품으로 남겼다. 제목이 따로 없어서 '유지사'로 불리는 시문이다.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아! 황해도에 사람 하나/맑은 기운 모아 선녀 자질 타고 났네/생각이며 자태 곱기도 해라/얼굴이랑 말소리도 맑구나//지난 세월 그 얼마였던가/슬프다 인생의 무성한 푸르름이여/나는 몸이 늙어 여색을 버려야겠네/세상 욕정 다해도 마음은 식은 재 같으니//저 아름다운 여인이여/사랑의 눈길을 돌리는가/황주 땅에 수레 달릴 때/길은 굽이굽이 멀고 더디구나//마음을 거두어 근원을 맑히고/밝은 근본으로 돌아가리라/내생이 있단 말 빈말이 아니라면/죽어 저 부용성에서 너를 만나리'.
그리고 다시 세 수를 더 써내려갔다.
'이쁘게도 태어났네 선녀로구나/10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이 몸인들 목석 같기야 하겠냐마는/병들고 늙었기로 사절한다네//헤어지며 정인처럼 서러워하지만/서로 만나 얼굴이나 친했을 따름이네/다시 태어나면 네 뜻대로 따라가련만/병든 이라 세상 정욕은 이미 재 같구나//길가에 버린 꽃 아깝고 말고/운영처럼 배항을 언제 만날까/둘이 같이 신선될 수 없는 일이라/떠나며 시나 써주니 미안하구나// 1583년 9월28일, 병든 늙은이 율곡이 밤고지 강마을에서 쓰다'.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며 쓴 눈물겨운 시문이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