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늘 새롭고 다른 설렘의 시작
남탓 말고 정성을 다해 살아갑시다
씨줄, 날줄 엮인 세상, 일체유심조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어요
소의 우직 행보로 '여여한 세상'을


홍승표
홍승표 시인
새해 새 아침입니다. 붉게 솟구친 햇덩이가 온누리를 더없이 따뜻한 손길로 살포시 보듬어 감쌉니다. 새해는 늘 새롭고 다른 설렘으로 안겨오지요. 지난 한해는 '코로나19'로 우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지난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이른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의 의미를 지닌 '아시타비(我是他非)'가 선정됐지요. 잘못을 서로 남 탓으로 돌리고, 상대를 비난하는 싸움만 무성했다는 방증입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일도 난무했지요. 그러나 그치지 않는 비는 없는 법입니다. 과거에 매달리면 밝은 내일은 보이지 않지요.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꿈과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겠는지요.

새아침 문득, 화가 이중섭의 흰 소(白牛)가 떠오릅니다. 백의(白衣)민족의 굳은 의지와 늠름한 기상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유명하지요. 흰 소는 설산(雪山)에서 맑은 물과 향기로운 풀만 먹는 신성한 동물로, 꿈속에서 만나면 행운이 깃든다고도 합니다. 소는 한 식구와 같은 노동력의 핵심이었지요. 유순한 데다 우직하고 끈기 있게 일을 잘해 농경시대에는 최고의 역용(役用)동물이었습니다. 논밭을 파 엎고 무거운 짐을 운반할 때는 열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곤 했지요. 그런가 하면 애경사가 생겼을 때는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든든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이제 농경의 기계화로 옛이야기가 됐지만, 저에게 소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오르막 내리막 가리지 않고 늘 뚜벅뚜벅 걸어가라는 가르침을 준 존재였지요.

학창 시절, 시골에서 머슴처럼 소를 키우고 농사일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소의 얼굴은, 힘겨움 속에서도 포근함이 가득한 어머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둠 속 워낭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의 평화로운 얼굴은 삶의 질곡을 온몸으로 견디신 아버지 모습이었지요. 입에 거품을 물고 달구지를 끌거나, 어금니를 질끈 물고 밭을 갈고 질펀한 논의 굴곡진 바닥을 써레질로 고르는 소의 뒤태는 아버지 뒷모습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논밭으로 달려가 부모님과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곤 했지요. 잔꾀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습관을 소에게 배웠고, 제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됐습니다.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말이 있지요. 말은 거센 물살 속에서 질주 본능으로 죽어라 헤엄치지만 제자리를 맴돌다 죽고, 소는 물살에 몸을 맡기면서 조금씩 헤엄쳐 결국 뭍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여름에도 홍수 때문에 물에 떠내려간 소가 수십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있는 것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지요. 내 능력을 과신해 거센 물살을 거스르면 말처럼 익사하기 쉽고, 물살에 몸을 맡기면서 뭍으로 향해 가면 소처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습니다. 호시우보(虎視牛步)라는 말이 있지요. 호랑이가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날카롭게 상황을 판단하되 황소처럼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저는 호시는 못돼도 적어도 우보로 걷고자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올해는 우직하게 걸어가는 우보만리(牛步萬里)로 남 탓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어떻게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면 더 나은 세상이 열리는 법이지요. 세상 모든 형상은 씨줄, 날줄로 엮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여러 상황의 흐름과 운이 조화를 이루면 좋겠지요. 일체 유심조(一切 唯心造)라,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했습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는 법, 기쁘고 보람이 있을 일부터 찾으면 세상이 달리 보이지 않겠는지요. 가슴 속 꿈과 희망이 싹을 틔우고 꽃이 피고 풍요로운 열매를 맺어 서로 나누는 넉넉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박한 삶의 성취가 기쁨 되고 감동이 되는 여여(如如)한 세상이 되기를….

/홍승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