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때면 진영 나눠져 부정적 비판만 난무
논리의 비약 상대 배려 외면에 기준도 모호
언론·지식인들 공정성유지 명분 흔한 논조
본질호도 잘못된 여론 조성… 사회적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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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양비론이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 왔다. 선거가 다가오면 진영을 나누어 정당과 정파 간 비난은 더욱 신랄해지고 비전이나 정책은 뒷전이고 오직 선거 승리를 위한 정치공학적 통합론만 무성하다. 양비론의 매력은 대립 갈등하고 있는 두 주장이나 명제를 한꺼번에 비판하는 논리여서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호쾌해 보인다. 일상생활에서도 양비론은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형제가 사소한 일로 다툴 때 말리는 부모의 말은 대체로 양비론이다. 피해가 경미한 접촉사고 현장에서 화해를 유도하기 위해 교통경찰이 양측의 실수를 지적하면 좀 불만이 있어도 수긍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양비론은 위태로운 논리이다. 각각 다른 기준으로 대상을 비판하거나 지나치게 이상적 관점에서 현실의 대상을 평가할 경우 대상들 간의 상대적 차이는 무시되고 부정적 성격만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오십 보 도망가나 백 보 도망간 병사나 매한가지라는 '오십보백보'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병사가 적진으로 도망갔다면 걸음 수를 기준으로 평가할 내용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양적인 기준과 질적인 기준을 의도적으로 뒤섞어 더 나쁜 대상을 옹호하는 물타기 논리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우리 사회에서 '논객'이라고 불리는 지식인의 주장에서 자주 발견되는 오류의 유형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공격하는 논리적 비약을 서슴지 않는다. 맥락도 없고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최소의 배려도 없는 언어들이 난무한다. 말은 시비를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증오와 환멸을 부르는 주술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논객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기존의 주장을 싸잡아 비판하는 태도는 곤란하다. 비판은 취향에 따른 선택과 달리 제3자나 비판 대상이 수긍할만한 기준이나 원칙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나 원칙이 분명하지 않은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다.

그런데 양비론이 외형적으로 객관성과 중립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태도는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공정성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흔히 사용하는 논조이지만 실은 본연의 책임을 회피하는 교묘한 기회주의이다. 어느 한쪽을 지지했다가 받을 수 있는 비난을 의식한 '균형감'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의 본질은 외면하고 사건의 주변 상황을 기사화하여 본질을 호도하여 잘못된 여론을 조성할 수 있다. 정론직필은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팩트'를 직핍하여 시비곡직을 엄정하게 밝히는 용기이다. 합리적 판단에 의한 양비론이라면 그 논리적 귀결은 질적으로 '새로운 길'이어야 한다. 양자의 단점을 모두 보완하면서 장점까지 내다 버리지는 않는 지양(止揚)의 대안이어야 한다. '새로운 길'은 없고 통합론만 내세우는 것은 기계적 중립주의이며 본질적으로는 내용 없는 양비론에 불과하다. 이같은 양비론이 횡행하면 비판 대상과 현실에 대한 냉소주의나 사회적 결정장애 상태를 야기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다. 정당 간 진흙탕 싸움과 같은 과도한 정쟁이 유권자들의 환멸감을 부르고 이것이 정치무관심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중국의 선진(先秦 )시대 제자백가들이 저마다의 사상과 논리를 기초로 한 경세와 치국론을 내세워 우열을 치열하게 다툰 시대였다. 대분열의 시기처럼 보이지만 중화문명을 형성하여 일약 세계의 선진문명 반열에 올랐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미칠 정도로 문화적 대도약이었다. 유가와 도가, 법가를 비롯한 다양한 학자와 학파들이 경쟁했던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보궐선거와 대선을 앞둔 우리 정당들도 국가 비전과 지방 경영의 어젠다를 놓고 격돌하는 정책경쟁의 일대 난장을 만들면 좋으련만! 양비론이 부상하는 이 계절은 지식인들과 언론의 역할이 한층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