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안에 꿈틀거리는 불길한 상상
막상 닥치면 의연히 해결할 일인데
가능성 없는 일들로 인해 괴로워 해
누구나 미숙함 있다는것 인정 중요
믿을만한 사람과 사연 나누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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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
인생을 살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상황에 처했을 때 종교인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인 입장에서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가 막힌 사연이 참 많습니다. 중증 장애인 아이를 둔 부모, 사업의 부도로 이혼은 물론 온 가족이 해체를 겪는 중년의 가장, 가정폭력으로 괴로워하는 아내 등등 사연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괴로움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들의 사연을 들으며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저마다 괴로움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각자 해답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별말씀 안 드리고 그저 공감하고 들어주었을 뿐인데 그들은 눈물을 흘리는 중에도 앞으로의 대안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에 기도를 부탁하곤 길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다시 보면 모두들 잘 극복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막상 정말 큰 불행이 닥치면 의연하게 잘 대처합니다. 그런데 작은 시련에는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맞벌이하는 아내와 함께 아이 둘을 키우는 가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취미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초등학교 동창 모임은 물론 각종 골프 모임에 남자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영 께름칙하다는 겁니다. 골프가 끝나면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아내를 보면서 좋지 못한 상상을 시작했습니다. 의심을 시작하고부터는 마음이 괴로워지고 힘들어졌습니다.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어느새 아내의 휴대전화를 뒤져보고 메시지 내용들을 왜곡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언성을 높이다 폭력에 이르게 되어 급기야 별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무 증거도 없는 일에 상상력이 더해져 일어난 일입니다. 사과를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한 뒤에 다시 함께 살고는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하루에도 수십번 떠오르는 망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또 한 예가 있습니다. 영상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자신이 감염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감염되면 같이 사는 부모님을 비롯해 다른 가족도 감염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괴로움을 키웠습니다. 코로나를 맞아 오히려 영상 작업은 일거리가 많아졌는데 다른 때 같으면 좋아서 쾌재를 외칠 이 상황에 그는 일하는 자체가 불안을 키우는 원인이었습니다. 출연자 중에 무증상자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의식적으로 더 거리를 두고 대화를 삼가는 것까지는 정상이지만 두려움에 떨면서 이 상황을 견디는 건 본인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모든 걱정으로 인해 잠도 못 자고 의욕도 사라진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감당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라도 막상 닥치면 사람은 모두 의연하고 대범하게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를 괴롭히는 괴물은 외부에서 오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불길한 '상상'입니다. 의처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코로나 블루를 자청해 겪고 있는 사람도 확신하건대 막상 문제가 닥치면 의연하게 해결할 이들입니다. 그런데 0.1%도 가능성 없는 일을 현실로 끌어들이고 괴로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찾아와 상담을 하면 우리 종교인도 몹시 어렵습니다. 있는 일도 아닌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면 우린들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자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그것을 믿고 있지도 않은 미래를 앞당겨 걱정을 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미숙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몹쓸 상상이 찾아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종교인들이나 믿을 만한 벗에게 이런 자신의 한심한 점을 나누길 바랍니다. 사연을 털어놓다 보면 한심한 자신을 더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확인해 주는 일이 이 괴물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