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영인해 첨부한 귀한 업적
단 300부만 인쇄 희귀 한정본
그중 화성성역의궤 인쇄 정리자,
계미자·갑인자·병진자 이목 끌어
우리 고서 내지 고문헌연구와 관련한 중요인물들로는 '한국서지'의 모리스 쿠랑·'고선책보(古鮮冊譜)'의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를 비롯하여 천혜봉, 손보기, 윤병태, 안춘근, 류탁일, 이종학 등의 교수 혹은 재야학자들이 있다. 고활자 분야로 국한시켜 놓고 본다면 파른 손보기(1922~2010)의 업적이 독보적이다. 파른의 '한국의 고활자'(1971)와 '금속활자와 인쇄술'(1977)이 바로 그것인데, 이 역저들 덕택에 필자도 우리 고서와 활자에 대해 까막눈을 면하고 약간의 이해라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고활자'는 44종에 이르는 우리의 활자들의 표본을 한지로 영인하여 첨부해둔 귀한 업적이다. 더구나 이 책은 한정본으로 단 300부만 인쇄된 희귀자료다. 국회도서관은 300부 한정판 가운데서 169번을 소장하고 있다. 필자는 300부 한정본에 포함되지 않은 '별쇄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별쇄본은 한정본과 달리 소프트 커버에 '한국의 인쇄술'이란 논문이 빠져있고 고활자에 대한 해제와 표본만 정리해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손보기 선생이 윤병태 선생께 헌정한 책으로 저자 사인이 들어가 있는 세상에 단 한 권만 있는 자료여서 필자가 애지중지하는 소장 자료 가운데 하나다. 유의미한 고서가 표지와 판권을 갖추고 내용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면서 저자 서명까지 들어가 있다면, 고서시장에서는 특급대우를 받는다.
'한국의 고활자'에 수록된 고활자들 중에서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1403년에 주조된 계미자(癸未字), 한국 고활자를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 1435), 조선의 제7대왕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개봉(改封)되기 이전인 진양대군(晉陽大君) 시절에 쓴 글자를 자본(字本)으로 삼은 병진자(丙辰字, 1436), 그리고 '화성성역의궤'를 인쇄할 당시에 사용한 정리자(整理字, 1795) 등이다.
병진자는 세조의 학문적 깊이와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정리자는 '사고전서'의 강희자전체를 글자본으로 한 생생자(生生字)를 본으로 대자(大字) 16만자, 소자(小字) 14만자를 제작, 조선후기 인쇄문화의 꽃을 피운 활자로 특별한 관심이 간다.
그 외 다양한 목활자(木活字)에 도자기를 구워 만든 도활자(陶活字)도 있었고, 심지어 박을 파서 만든 포활자(匏活字)도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처럼 책과 활자에 관한 한 우리는 세계적인 국가이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이 허름한 민가에서도 책을 소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사회활동과 레저 생활도 제약을 받은 상황에서 팬데믹 블루를 이겨낼 마음의 방역은 무엇인가. 산책, TV보기, 바둑, 혼술, SNS도 있지만 책(독서와 고서 감상)도 있다. 정치적·정서적 곤경에 처한 채 땅끝마을 해남에서 은거하던 윤선도가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 연시조 '오우가'를 읊으며 수·석·송·죽·월이란 다섯 벗과 함께 생의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갔듯 우리도 코로나 블루를 이겨낼 각자의 오우(五友)가 있어야 한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지혜샘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