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종의 우리 활자 표본을
한지로 영인해 첨부한 귀한 업적
단 300부만 인쇄 희귀 한정본
그중 화성성역의궤 인쇄 정리자,
계미자·갑인자·병진자 이목 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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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지혜샘도서관 관장
세계문화사에 빛나는 우리의 발명품으로 '한글'에 '금속활자'를 꼽을 수 있다. 금속활자가 등장하기 이전인 11세기 중반 흙에 아교를 섞어 구운 중국 송나라 필승(畢昇)의 진흙활자도 나왔지만, 고려에서 만든 금속활자에 비할 바 못된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은 이 뛰어난 '발명'이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영향력의 부재이겠으나 금속활자의 등장이 인류 문화사의 대사건임을 부정할 수 없겠다.

우리 고서 내지 고문헌연구와 관련한 중요인물들로는 '한국서지'의 모리스 쿠랑·'고선책보(古鮮冊譜)'의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를 비롯하여 천혜봉, 손보기, 윤병태, 안춘근, 류탁일, 이종학 등의 교수 혹은 재야학자들이 있다. 고활자 분야로 국한시켜 놓고 본다면 파른 손보기(1922~2010)의 업적이 독보적이다. 파른의 '한국의 고활자'(1971)와 '금속활자와 인쇄술'(1977)이 바로 그것인데, 이 역저들 덕택에 필자도 우리 고서와 활자에 대해 까막눈을 면하고 약간의 이해라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고활자'는 44종에 이르는 우리의 활자들의 표본을 한지로 영인하여 첨부해둔 귀한 업적이다. 더구나 이 책은 한정본으로 단 300부만 인쇄된 희귀자료다. 국회도서관은 300부 한정판 가운데서 169번을 소장하고 있다. 필자는 300부 한정본에 포함되지 않은 '별쇄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별쇄본은 한정본과 달리 소프트 커버에 '한국의 인쇄술'이란 논문이 빠져있고 고활자에 대한 해제와 표본만 정리해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손보기 선생이 윤병태 선생께 헌정한 책으로 저자 사인이 들어가 있는 세상에 단 한 권만 있는 자료여서 필자가 애지중지하는 소장 자료 가운데 하나다. 유의미한 고서가 표지와 판권을 갖추고 내용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면서 저자 서명까지 들어가 있다면, 고서시장에서는 특급대우를 받는다.

'한국의 고활자'에 수록된 고활자들 중에서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1403년에 주조된 계미자(癸未字), 한국 고활자를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 1435), 조선의 제7대왕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개봉(改封)되기 이전인 진양대군(晉陽大君) 시절에 쓴 글자를 자본(字本)으로 삼은 병진자(丙辰字, 1436), 그리고 '화성성역의궤'를 인쇄할 당시에 사용한 정리자(整理字, 1795) 등이다.

병진자는 세조의 학문적 깊이와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정리자는 '사고전서'의 강희자전체를 글자본으로 한 생생자(生生字)를 본으로 대자(大字) 16만자, 소자(小字) 14만자를 제작, 조선후기 인쇄문화의 꽃을 피운 활자로 특별한 관심이 간다.

그 외 다양한 목활자(木活字)에 도자기를 구워 만든 도활자(陶活字)도 있었고, 심지어 박을 파서 만든 포활자(匏活字)도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처럼 책과 활자에 관한 한 우리는 세계적인 국가이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이 허름한 민가에서도 책을 소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사회활동과 레저 생활도 제약을 받은 상황에서 팬데믹 블루를 이겨낼 마음의 방역은 무엇인가. 산책, TV보기, 바둑, 혼술, SNS도 있지만 책(독서와 고서 감상)도 있다. 정치적·정서적 곤경에 처한 채 땅끝마을 해남에서 은거하던 윤선도가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 연시조 '오우가'를 읊으며 수·석·송·죽·월이란 다섯 벗과 함께 생의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갔듯 우리도 코로나 블루를 이겨낼 각자의 오우(五友)가 있어야 한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지혜샘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