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속 얘기는 일상과 꿰어져 있다
살아내야하는 것은 온통 개인의 몫
누군가의 가난·박탈·죽음엔 침묵
가진것들에 욕망 크기는 안줄인채
자취하는 친구 집에 몇 명의 친구가 모여 함께 지냈다. 휴학하던 시기에는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았고 복학할 때에는 디스크 치료까지 받게 됐다. 온라인 수업에 참여하거나 과제를 하기 위해 앉아 있는 시간도 그에겐 고통스러웠다. 코로나19가 잠깐 주춤하던 시기, 대면 수업이 열렸다. 버스를 타고 학교 오는 길, 통증을 감당할 수 없어 중간에 택시를 탔다. 돌아가는 길에도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표정이 없었고 그만큼 이야기는 담담했다. "고생했네"란 말로 시작해서 "그래도 애써 보자"란 말로 끝낸 위로를 건넸다. 그 '말'의 순간이 문득, 그렇지만 자주 생각났다.
뉴스를 보다 한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집에 보호자 없이 남겨진 8살, 10살 형제는 화재를 피하지 못했고 8살 동생은 깨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 젊은 엄마는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되어 검찰에 송치됐다. 스물에 첫 아이를 낳은 엄마는 남편 없이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매달 수급비를 받으면서도 종이가방을 접고 포장작업을 했다. 지난해 7월에는 그마저도 일이 끊겼다. 종이가방을 접고 포장작업을 해서 버는 60만원은 더 이상 마련할 수 없었다. 첫째 아이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판정을 받았고 우울증을 앓던 엄마는 수차례 아동학대로 신고당했다.
주어는 매번 다르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기사를 읽을 때마다 사건 속의 이야기와 일상이 보이지 않는 실로 꿰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미혼모 신분으로 아이를 기를 수 없어 입양기관에 보낸 아이가 양부모의 학대로 사망했다', '자택 화장실에서 출산한 둘째 아이를 4층 창밖으로 던져 숨지게 한 이십대 엄마가 7살 아이와 함께 도주하다 잡혔다',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연명치료를 포기한 41살 엄마가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결국 인공호흡기를 떼어 사망했다'는 기사들 말이다.
살아내야 하는 것이 온통 개인의 몫이다. 돌봐줄 부모를 갖는 것,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고 과제를 해내고 팀 프로젝트에 제 몫으로 참여하고 제때 졸업하고 취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온전한 개인의 능력이 아님은 오늘의 일상을 통해 증명된다. '그럴만한 노력의 결과로 얻은 성공'은 그 반대, '변명의 여지 없는 뒤쳐짐', 그래서 '연민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란 무의식적 신념도 함께 만들어 냈다.
온종일 일해도 어떤 일들은 최저 시급에 머무른다. 아무리 원해도 누군가는 배우고 안정된 직업을 갖는 것이 어렵다. 개인의 나태와 무능이 아니라 불운을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하는 구조의 나태와 무능이 더 큰 원인이라는 것을 이젠 우리 모두 안다.
지나치게 화려한 공공건물들과 굳이 필요없는 더 빠른 데이터 통신망의 시절에도, 걱정 없이 배우고 큰 어려움 없이 자신과 가족을 돌보며 살아 내기 어려운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아파트 보유세 907만원이 4천754만원이 됐다는 분노는 그렇게 폭등한 세금을 가능토록 한 가파른 집값 상승과 그 이면의 목소리, 그러니까 누군가의 가난, 누군가의 박탈, 누군가의 죽음에는 침묵한다. 가진 것들에 대한 욕망의 크기를 줄이지 않은 채, 한 사람을 처벌하고 관련 법을 개선하자는 말로 쌓은 분노와 "그래도 애써보자"란 위로만으론 그이들의 비통에 닿을 수 없다.
/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