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권력 비판, 최인훈 소설 '화두'
해당구절 되새김은 與에 실망 때문
조국 드러난것 불인정·유시민 사과
개혁 논리적 확증편향 일부 선동자
연동형비례 걸레쪽·김진숙 무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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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최인훈 장편소설 '화두'에는 조명희의 삶과 이념이 곱씹어 제시된다. 특히 그의 죽음에 관한 접근은 성실한 연구자의 작업에 비견할 수준이다. 조명희는 이기영과 더불어 전반기 카프를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자신의 이념을 좇아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1938년 일본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아 재판 없이 사형당하고 말았다. 간첩 혐의는 독재정권이 비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덧씌운 누명에 불과하였으니 스탈린이 죽은 뒤 그 명예가 회복되었다.

조명희가 처형될 당시 4만명이 체포당했으며 그들 중 2만명이 학살당했다. 한인은 3천여 명 죽었다고 한다. 과연 최인훈은 대가답게 이를 절대화된 권력의 문제로 이끌어간다. 절대권력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 꼭대기에 걸려 있는 대의(大義)의 깃발을 내리지 않는다'. 성의 사령탑을 차지한 사람들은 역사적인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하여 숙청이 필요하였음을 증명해야 한다. 농성 와중에 '배급량을 더 탄다거나, 특별 배급을 타는 위치에 있기 위해서 숙청한 것이 아님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화두'를 꺼내들고 해당 구절을 되새겼던 까닭은 여당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현 정부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의 성과에 발 딛고 출현할 수 있었다. 180여 석에 이르는 거대 여당의 출현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니 그들은 마땅히 촛불정신을 실현해 내야만 한다. 촛불정신이 그네들의 머리 위에 깃발로 나부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당은 과연 그 깃발을 제대로 부여잡고 있는가.

깃발은 오로지 검찰 개혁을 주장할 때만 요란하게 펄럭이는 듯하다. 검찰을 개혁하자는 데 이견은 없다. 그렇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식과 수준이 어느 정도 제시되어야만 혼란을 피할 수 있다. 예컨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둘러싼 검찰의 먼지떨이 수준의 조사에 맞서기는 하되, 드러나고 있는 사실 여부에 대해 인정할 수 있는 여유는 그래야 가능해졌을 터이다. 유시민은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전선(戰線)의 전면에 나서서 검찰의 노무현재단 사찰을 주장하였다가 결국 사과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검찰을 불신하여 악마화하였고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혀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다"는 것인데, 이 또한 방식과 수준에 대한 고민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법원의 판단이 검찰 측에 유리하다며 차제에 사법부를 개혁하자는 일부 정치인들의 선동은 그러한 태도의 연장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촛불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던 이들을 제대로 끌어안고 있는가. 걸레쪽이 된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김진숙의 복직투쟁은 이를 판단할 수 있는 상징이다. 민의를 폭넓고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하여 선거법을 개정하였으나, 총선을 맞아 급조한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는 이를 무위로 돌려놓는 여당의 선택이었다. 적폐로 지목한 정치 세력과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어갈지언정 권력을 정의당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김진숙의 복직투쟁 무시는 노동운동에 결코 호의적일 수 없다는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정의당과 노동운동은 그네들의 깃발 바깥으로 쫓겨난 형편이라는 것이다.

깃발을 흔들면서도 자신들의 배급량을 솔선수범하여 줄이는 것 같지도 않다. 청와대 인사들이 소유 주택을 마지못해 매각하면서 보여줬던 여러 개 희극 장면이 나름의 판단 근거다. 중대재해처벌기업법 등 여러 개혁 법안들은 실효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수준에서 만들어졌을 따름이다. 허울만 갖춘 채 통과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입법이 장막 뒤에서 벌어질 만한 로비와 과연 무관하게 결정되었는가는 심히 의문이다. 특별 배급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는 말이다.

기실 더불어민주당은 이전에도 촛불집회의 덕을 누렸던 바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연이어졌고 이는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개혁은 없었다. "과반 의석만으로는 보수언론과 야당의 발목 잡기를 뿌리칠 수 없다." 열린우리당의 변명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국 정권을 내주며 결국 폐족(廢族)이라 자조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모쪼록 그와 같은 역사가 180여 석의 현 여당에게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