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기업 '150년 연공서열제 파괴' 변화 감지
군수재벌 미쓰비시케미컬도 100% 직무성과
오너, 직원 가솔 간주한 亞고도성장론 요체
유교자본주의… 한국선 더빨리 사라질조짐

이한구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
일본 기업사회에 패러다임의 변화가 감지된다. 간판기업인 토요타, 후지츠, 히타치, 손보재팬 등의 성과연봉제 도입 선언에 이어 일본 최대의 화학기업 미쓰비시케미컬이 올해 4월부터 1만2천여사원 인사평가에 근무 연차 항목을 없애고 리더십, 사업능력, 문제해결능력 등을 반영하기로 했다. 대리가 부장보다 연봉을 더 받거나 후배가 먼저 승진하게 된다. 근속 연수에 상관없이 100% 직무성과로 연봉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연공서열제가 임직원들의 혁신과 도전의식을 약화시키고 자리보전에만 집착케 해서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미쓰비시케미컬은 일본근대화의 선구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미太郞, 1835~1885)가 1870년에 창업한 미쓰비시그룹의 핵심계열사여서 더 주목된다. 미쓰비시는 일본제국주의에 편승해서 최대재벌로 성장한 군수기업이자 태평양전쟁 때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물의를 일으킨 일본의 대표적 극우기업이다.

연공서열제란 근무기간이 길수록 직급과 월급이 상승하는 시스템으로 일본경제 근대화 150년 역사의 키워드이다. 미국의 동북아 권위자인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일본기업의 고속성장 비결로 연공서열제를 꼽았다. 보겔은 이 제도가 직원들에게 안정적인 미래를 제시해서 애사심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일본인들은 일본 특유의 기업문화로 산업별 노조가 아닌 '기업내 노조'와 '종신고용' 그리고 '연공서열'을 내용으로 하는 '삼종(三種)의 신기(神器)'를 자랑한다.

일본인들은 자신보다 크거나 강한 존재에게 순종하고 의지하는 습성이 있다. 지진이나 화산폭발 등 빈번한 자연재해 탓이 큰데 오늘날에도 일본이 여전히 세계 최고의 '신(神)들의 나라'인 점이 시사하는 바 크다. 이런 습성은 사회생활에도 강한 영향을 미쳐 일본인들은 모든 사회조직을 집(家)으로 간주하고 가부장주의를 맹신했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 기업의 오너경영인은 조직원들을 한솥밥을 먹는 가솔(家率)로 간주한다.

지난해에 작고한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를 일본인들의 집단무의식으로 규정했다.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브 융은 집단무의식을 인류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축적한 모든 잠재적 기억의 흔적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미국 하버드대학 중국학 종신교수인 뚜웨이밍(杜維明)은 연공서열제를 인의(仁義)의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동양사회 고도성장론의 요체로 일반화했다. 유교자본주의 혹은 아시아적 가치론의 탄생배경이다.

한국에서는 유교자본주의 문화가 더 빨리 사라질 조짐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종신고용 관행이 사라진 터에 직장에서 '우리'를 강조하는 선배사원들을 '꼰대'로, '나'를 우선하는 밀레니엄세대 사원들을 '싸가지'로 갈등하는 추세여서 성과연봉제가 쉽게 안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정부의 제임스 매티스 초대 국방장관의 발언이 떠올려진다. 해병대 대장출신이자 '전사(戰士)수도사'로 존경받았던 매티스는 2018년에 국방장관으로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북한핵 문제나 중국의 부상, 중동 불안, 사이버 공격 등이 아닌 미국 군인들의 '소외감'이라 답변해서 주변을 당혹케 했던 것이다.

"자신이 더 큰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잃는다면 동료들을 위해 애쓸 필요가 있을까요?"

매티스는 애국심과 전우애로 상징되는 군대조직 특유의 사회적 자본의 상실을 우려한 것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을 '개인 사이를 연결하는 사회관계망과 그로부터 생성되는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이라 정의했다. 신용이나 의리, 충성심 등은 사람들 간 유대의 산물로써 선의와 선행에 보답하는 행위의 원천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군사적 열세에도 진주만기습을 감행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본군인의 '진충보국(盡忠報國)'정신을 확신했던 때문이었다.

사회적 자본은 기계, 부동산, 화폐 등 물적 자본에 버금가는 매우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다. 아시아사회의 근대화를 실증해낸 유교자본주의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