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중심 결성
홈구장 웃터골경기장에 구름 인파
日심판 오심으로 몸싸움 번져 해체
민족의식 높인 활동으로 평가받아
인천의 야구는 일제강점기 때 민족운동의 하나로 일어났다. '구도(球都) 인천'이라 불리기도 했다. 신세계그룹이 인천 SK와이번스를 인수해 유통과 프로스포츠를 결합한 새로운 사업모델 구상을 밝힌 가운데 다른 지역과는 남다른 인천 야구의 의미까지 앞으로의 구단 운영과 마케팅에 담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인천의 첫 야구단은 1920년 창단한 한용단(漢勇團)이다. 국회의장까지 지낸 거물 정치인 곽상훈(1896~1980)이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했던 인천 학생들이 모인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중심으로 한용단을 만들었고, 자신이 단장을 맡았다. 당시 선수 구성은 16~17세 학생들이었다.
한용단의 홈구장은 현 중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경기장'(인천공설운동장)이었다. 인천시민들은 야구단을 열렬히 응원했다. 특히 한용단이 일본인 팀들과 맞붙을 때 응원 열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 등을 보면, 한용단은 인천미두취인소의 '미신'(米信), 일본철도사무소의 '기관고'(機關庫) 등 일본팀과 경기를 가졌다.
고일이 1955년 쓴 '인천석금'은 한용단의 한일 야구전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야구대회가 있다고 소문만 나면 시민 팬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엿장수도 오고 지게꾼도 대섰다(바짝 가까이 서거나 뒤를 잇대어 서다). 할머니도 '스트라익'하고 할아버지도 '호무랑'(홈런의 일본어 발음) 소리를 외쳤다."
1924년 한용단과 미신 팀의 결승전에서 일본인 심판의 오심으로 우승을 놓쳤다며 분노한 곽상훈 단장이 일본인 검도 사범과 몸싸움을 벌였다. 이때 한국인 관중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일본인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을 빌미로 한용단은 해체됐다.
인천 야구 역사의 시작점인 한용단은 단순히 스포츠에만 머문 게 아니라 일제강점기 인천시민들의 민족의식을 높인 활동으로 평가받는다.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는 2005년 펴낸 인천론집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일본인 심판의 불공정으로 한용단이 지면 일경과 난투극도 서슴치 않았던 인천 시민의 비상한 야구열"이라며 "한용단은 운동경기의 외피를 쓰고 출현한 민족적 단결체였다"고 했다.
향토사학자인 강덕우 인천 개항장연구소 대표는 "인천은 합중국, 유나이티드(United)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성의 집합체로 이제는 신세계그룹도 프로야구단으로 인천에 들어왔다"며 "새로운 야구단 운영에는 의미가 깊은 인천 야구 역사가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