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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 비운의 곳간지기 왕후가 등장한다. 연합군을 이끌고 원술 정벌에 나선 조조에게 곳간지기 왕후가 군량미가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조조는 군량미 배급을 줄일 것을 명한다. 당연히 군사들이 반발했다. 조조는 즉시 왕후를 불러 참수한 뒤 그에게 군량미 횡령죄를 덮어씌웠다. 왕후의 목 하나로 자신의 책임을 면한 건 물론이고 군율의 엄정함을 보여줌으로써 군사들을 독려해 전쟁에서 이겼다. 나관중은 정사에 없는 가공인물 왕후의 에피소드로 간웅 조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대한민국 곳간지기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SNS에 "지지지지(知止止止)의 심정"을 올려 화제다. '그침을 알아 그칠 곳에서 그친다"는 뜻이라고 하니,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귀거래사로 보여서다. 홍 부총리는 지난 연말엔 실제로 사표를 던졌다가 대통령이 반려하자 곧바로 직무에 복귀한 적도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국난 이후 홍 부총리는 여권 대선주자들과 끊임없이 설전을 벌여왔다. 국가부채 걱정 말고 돈을 풀자는 대선주자들의 요구에, 홍 부총리는 적자재정의 한계를 들어 번번이 반대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경기도형 재난기본소득 지급으로 국가 재난지원금 보편지급을 선도했다. 홍 부총리는 선별지원을 강조하며 맞섰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자영업자 손실보상법 법제화를 추진하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수준 낮은 자린고비(이재명)", "이게 기재부의 나라냐(정세균)"라는 비판의 칼날이 시퍼랬다.

급기야 이낙연 민주당 대표마저 선별과 보편 지원을 모두 포함한 4차 재난지원금 추경 편성 의지를 밝히자, 홍 부총리는 보편지원과 선별지원 동시 실시는 힘들다며 '지지지지의 심정'을 밝힌 것이다.

홍 부총리는 여권 실세들과 설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늘 실세들의 요구가 관철됐다. 이 때문에 '홍두사미', '홍백기'라는 별명마저 얻었다.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권력 앞에, 예산편성권으로 행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호령하던 기재부가 한없이 작아지고 있다. 아무리 유능해도 권력의 크기가 알량하면 욕먹고 내쳐지기 십상인 것이 곳간지기의 운명이다.

홍 부총리가 이번엔 '지지지지의 심정'을 배수진 삼아 나라 곳간을 지켜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