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401000228100009791

"현실을 보면 세상의 모든 권력과 금력, 인연 등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를 바른길에서 벗어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내 힘이 모자라서 이와 같은 유혹을 당하게 된다면 인생으로서의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법관의 존엄성으로 비추어 보아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이 법관들에게 강조한 말이다. 가인은 대한민국의 사법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권에 맞서 사법부에 대한 압력과 간섭을 물리쳤다. 신념과 사명감으로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을 지켜냈다. 이 대통령이 사표를 종용하자 목발에 의지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등원할 정도로 강직했다.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탄핵과 관련, 김명수 대법원장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해 5월 임 판사가 사표를 내자 국회 탄핵을 이유로 반려했는지를 두고 진실 공방이 벌어지면서다. 김 대법원장은 탄핵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대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입장이 궁색해졌다.

녹취록에 따르면 김 대법원장은 "사표 수리, 제출 그런 법률적인 것은 차치하고 나로서는 여러 영향, 정치적인 상황도 살펴야 한다"며 "국회에서 탄핵하자고 설치고 있는데 사표를 수리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느냐"고 했다.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굉장히 적절하지 않다"는 말도 한다.

법원 내부는 물론 정치권의 비판이 거세다. 대법원장이 법치주의가 아닌 정치 논리로 판단한 행위라며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후배를 탄핵으로 떠미는 모습까지 보인 대법원장은 후배들에게 창피하지 않으냐'는 질책도 있다. 야당 유력 정치인은 "후배의 목을 뇌물로 바쳤다"고 개탄했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하면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온몸으로 막아내겠다"고 했다. 언행 불일치요,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녹취록이 공개되자 '국민께 죄송하다'고 사과했으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는다. 독립과 중립, 공정을 지켜내야 할 사법기관의 수장이 벼랑 끝에 섰다.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가벼울 수 없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부장판사가 국회에서 탄핵 소추됐다. 대한민국 법원사에 유례없는 위기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