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얗고 큰 오븐 수십 년 쓰고 싶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매일 같은 집안의 일상이 시시하다
친구 단톡방선 만날 날 잡아보지만
마지막엔 "코로나 잠잠해지면 보자"

응접실은 절대 출입금지구역이었다. 할머니도 마른걸레를 쥐고 청소를 할 때나 드나들었을 뿐, 그곳은 추억을 저장하는 용도 이외로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먼지를 피워서는 안 되는 곳. 훗날 나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을 번역했는데, 거기에도 이런 응접실이 나온다. 앤은 다이애나를 티파티에 초대한 뒤 응접실로 데려가고 싶어하지만 마릴라는 단박에 거절이다. "너희한텐 거실이 딱이야. 응접실은 절대 안 돼!"라고 말이다. 마릴라가 응접실에 모시는 손님이란 오직 목사님뿐. 나는 그 이탈리아 할머니네 응접실 입구에 서서 그곳을 한참 쳐다보았다. 아, 나에게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그런 생각을 그날 처음 했더랬다.
이탈리아 할머니에게는 응접실 외에도 끔찍하게 아끼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주방에 놓인 가스오븐이었다. 딱 봐도 수십 년은 된 듯한 하얀 오븐이었다. 어찌나 행주질을 했는지 땟자국, 물자국 하나 없이 맨들맨들했다. 오븐을 닳게 한 거라곤 행주질밖에 없는 듯한 물건이었다. 친구가 투덜거렸다. "내가 불에 뭘 얹기만 하면 뒤에 서서 아주 뚫어져라 노려본다? 국물이라도 흘릴까 봐 그러는 거지. 내가 부엌에서 얼마나 긴장하는지 알아?"
나는 그 오븐이 그렇게나 부러웠다. 마르고 닳도록 닦아내며 아낄 수 있는 물건이란 얼마나 예쁠까. 나도 하얗고 커다란 오븐을 하나 사서 그렇게 수십 년을 쓰고 싶었다. 누가 건드릴라치면 으르렁, 사나운 눈을 하고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무섭게 굴고 싶었다.
코로나 시국이 끝도 없이 길어지면서 밖에 나가는 일이 극도로 줄었다. 아이가 지난 일 년 동안 어린이집에 간 건 다 합쳐봐야 두 달도 되지 않는다. 예쁜 카페에 가지도 않고 백화점 아이쇼핑도 하지 않으니 눈호강 할 일이 없다. 매일 집밥을 먹고 매일 같은 소파에 앉고 매일 같은 커튼을 열고 닫으니 사는 일이 시시하다. 그래서 공연히 베갯잇을 새로 사고, 아이 놀이 텐트를 바꾸고 카펫을 바꾼다. 예쁜 옷을 사도 입고 나갈 일이 없으니 아이와 내 파자마만 인터넷 쇼핑으로 고르고 실내용 슬리퍼를 살 뿐이다. 급기야 소파도 바꾸고 싶어졌다. 이탈리아 할머니네 응접실처럼 여기저기 꽃무늬 벽지를 새로 바르고 폭신하고 고풍스러운 의자를 들여놓을까? 이탈리아 할머니네 오븐처럼 하얗고 커다란 오븐을 새로 살까? 모서리가 둥글둥글 귀여운 오븐은 대체 어디에서 파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 집 소파는 산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았고 이 집은 지은 지 4년인 신축 아파트라 도배지 얼룩도 하나 없이 말끔하다. 물론 광파오븐도 집들이 기념으로 산 거라 아직 말짱하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새로 들이지 못할 것이다. 수세미에 베이킹소다를 잔뜩 묻혀 광파오븐 속 묵은 때나 벗겨내는 오후가 되겠지. 새 응접실을 만들고 친구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은 또 마음 한편으로 묵혀야겠지.
친구들은 단톡방에 모여 "이젠 정말 얼굴 좀 봐야겠어. 이렇게는 못 살겠어. 사람이 그리워 죽을 것 같아!" 외치며 만날 날을 잡아보지만 아이들이 어린이집도 학교도 가지 않아 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겨우겨우 시간을 맞춰본다 싶으면 누군가 한마디한다. "그런데, 5인 이상 집합금지 안 풀렸잖아." 그래, 다 알고 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보자"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렇다면 커튼을 바꿔볼까? 우리 집 말고, 밖에 있는 기분을 좀 느낄 수 있도록, 회색 커튼 떼어내고 붉고 푸른 커튼을 달아볼까? 내 지루한 표정을 읽은 아이가 종알거린다. "그럼 엄마 방이랑 내 방이랑 바꿔볼까? 우리 집이 완전히 달라질 것 같아." 그만 푸푸 웃고 만다. 미안, 그건 곤란해. 품이 너무 많이 들거든.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