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아,/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
죄송해요/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이 되는 것을요/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처럼/순간이 순간을 불러 순간에 복무하는 것인데 //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이규리(1955~)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완벽한 그리움이란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을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기억 속에서 온전하게 박제된 약속처럼. 서로 좋은 날을 골라 약속을 했지만 그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는 막연한 상황에서 또 그것을 죽음으로 놓쳐버린 기막힌 사건이 되기 전, 그리운 사람은 그리워할 때 만나야 한다. 말하자면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처럼 꽃은 계절과 상관없이 모든 날 모든 순간 피어나듯이 만나는 날이 꽃이 피는 날인 셈이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 전에 꽃보다 먼저 피어나 세상을 떠났다면 그 아픔은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자신을 때리는 것'만큼 충격적일 것이다. 꽃은 지기 위해 절정에 이르는 것처럼 우리 목숨 또한 언제 그럴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알고 싶지 않다면 어제 한 약속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생에 대한 예의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