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따라 그 향방 달라지는 삶과
그 몫 끌어안은 삶 말 하려는 것일까
고통과 괴로움 가득 찬 인간세계
또 다른 선택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고역이라고 짓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손님을 환대하기는커녕 왔던 손님도 되돌아갈 만한 이름이 아닌가. 마치 손님이 찾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이름을 가진 게스트하우스 고역의 주인은 윤상요이다. 대체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 사연을 알면 윤상요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여러 인물과 장치를 통해 이 물음을 풀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선 한규진 기자이다. 출판을 앞둔 윤상요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한규진에 의해 최근 몇년 간의 행적이 드러난다. 사회학자인 윤상요는 2018년 여름,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우리 사회가 조건 없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짜 난민과 진짜 난민을 구분하고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난민 수용 반대의 주장을 신인종주의라고 비판했다. 과거 피부색으로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한 인종주의와 달리 신인종주의는 문화의 차이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며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는다는 것이다.
인터뷰의 장치를 통해서 윤상요를 사회학자로 설정한 이유는 설명되지만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고역이라고 한 까닭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송민기의 등장은 틈입에 가깝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 느닷없이 나타난 송민기는 윤상요에게 출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송민기의 등장으로 무대의 이야기는 예멘 난민 문제에서 윤상요가 겪은 과거의 사건으로 전환한다.
이 대목에서 관객은 또 다른 극적 질문을 하게 된다. 송민기는 누구인가. 대체 송민기와 윤상요는 어떤 사이인가. 극이 진행되면서 이야기는 8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8년 전 윤상요가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사실을 송민기는 알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잊을 수 없는 상처를 후빈다. 송민기는 예멘 난민을 조건 없이 환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윤상요가 한낱 위선자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대체 송민기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송민기는 어린 딸을 잃었다. 그의 딸을 살해한 범인이 바로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였던 것이다. 송민기의 주장은 8년 전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를 위해 윤상요가 탄원서를 제출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렇게 가벼운 형량을 받지만 않았더라면 자신의 딸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침내 송민기는 윤상요에게 묻는다. 그 가해자를 용서했냐고. 사고를 내고 50미터나 더 달린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냐고. 그리고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그를 위해 탄원서를 쓸 것인지 묻는다.
아내마저 떠난 텅 빈 마당에서 윤상요는 운다. 봄밤 오동나무 아래에서 그의 흐느끼는 울음을 타고 두 문장이 한 곳에서 만난다.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자식을 잃은 상처와 그 상처를 그렇게라도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는 심정에 가 닿는 말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요." 이 문장은 제주에 도착한 예멘 사람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어 추방해야 한다는 혐오의 말에 맞선 신념의 말이다. 한 문장은 과거에 속하고, 다른 한 문장은 미래에 속하지만 두 문장 모두 하나의 집에 속해 있다.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고역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삶이라는 집에 속해 있다.
연극 '고역'은 마치 도덕실험 교본과도 같다. 선택에 따라 그 향방이 달라지는 삶과 그 선택의 몫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 또한 삶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짧은 에필로그 장면에서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이었던 고역은 출판사 이름으로 옮겨간다. 아내와 함께한 결정이다. 연극의 부제인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찬 인간세계는 그렇게 또 다른 선택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