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악인은 국가와 세상이라는
큰 사회악을 혼내주며
통쾌함·카타르시스를 선사
대중들의 마음을 훔친다
윤백남은 소설가·영화감독·극작가를 겸업한 전방위적 대중문화기획자로 '야담'을 근대적 대중문화 콘텐츠로 탈바꿈시켜 놓았는가 하면, '대도전'과 '흑두건'(1934) 같은 대중소설로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대도전'은 신문연재소설로 큰 인기를 누리며 1962년에는 영화로, 1989년에는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내용은 이렇다. 고려 공민왕 시절 기황후의 동생 기주가 반원정책에 반대하다 반역죄로 죽음을 맞는다. 멸문지화의 위기 속에서 기주의 일점혈육 무룡이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장성하여 마적두목 맹획 휘하의 단원으로 살아가던 중 자신의 신분과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된 무룡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공민왕과 어머니의 원수 맹획에게 복수한다. 절세의 미인이자 마적 두목 맹획의 딸 난영과의 로맨스도 그렇고 무림의 고수를 만나 무예를 익히고 복수에 성공하는 무협소설적 스토리와 광활한 중국의 대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사는 '대도전'의 식지 않는 인기 비결이다. 그러나 '대도전'은 이 압도적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반원 자주정책을 펴는 공민왕의 노선에 역행하는 매우 못마땅한 모습과 함께 세상을 구원하고 정의를 베푸는 대도(大盜)의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복수극으로 끝나는 퇴행의 서사이다.
'대도전'의 이 갈지자 행보를, 정혜영 교수는 윤백남의 가족사와 1930년대 엄혹한 정치적 상황에서 찾는다. 작가 윤백남의 아버지 윤시병은 구한말 무과에 급제한 관리로서 자주독립 노선을 주창한 '만민공동회'의 회장을 지내다 친일단체 '일진회'의 지도자였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 편에 선 공로로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가문의 비극으로 충성을 바칠 국가도, 대상도, 전망도 없었던 무룡처럼 윤백남 역시 친일이라는 가문의 멍에와 식민지 치하라는 역사적 한계 속에서 일본인도, 조선인도, 친일도, 독립운동도 할 수 없었기에 아예 대중문화 속으로 투항해 버린 것이다. 소도(小盜) 무룡의 이 애매한 태도는 어쩌면 와세다 대학 상과 출신의 수재 윤백남의 내면과 정치적 무의식을 반영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
도적과 범죄를 칭송하는 범죄의 낭만화 내지 낭만화한 범죄 이야기의 꾸준한 인기는 나쁜 악인이 국가와 세상이라는 그 큰 사회악을 혼내주기에 여기서 대중들이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얻기 때문일 것이다. 비적(匪賊)들의 유격전술과 조직에서 힌트를 얻은 마오쩌둥은 '적이 나오면 물러서고(敵進我退), 적이 멈추면 소란스럽게 하며(敵止我擾), 적이 피하면 공격하고(敵避我擊), 적이 물러가면 나간다(敵進我退)'는 저 유명한 16자 전술로 중국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카와이 테이키치의 '중국민란사'(1979)나 에릭 홉스 봄의 '밴디트, 의적의 역사'(2004) 등 흥미진진한 의적의 컬렉션들을 읽으면서 코로나 스트레스를 다스리면 어떨까. 도둑은 그저 물건을 탐하고 생명을 훔치지만, 의적은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훔친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지혜샘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