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옹호하는 적잖은 국내학자들
재단이 출연 亞연구기금 받는 현실
관우 사당앞에서 맹세하는 상인이
어떻게 타락하는지 보여주는 사태

호이안에 관우 사당이 들어섰던 까닭도 자위관에서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관우의 신격(神格)을 두고 굳게 맹세하였던 상인들의 의리는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은 선인들의 가르침이 작동하였던 탓이리라. 선인들은 군자가 의리를 앞세우는 반면 소인은 이익을 좇을 따름이라고 대조해 놓았는바, 중국 상인들의 활동은 이익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공유하였던 의리란 다만 자위(自衛)와 이익 배분을 위하여 그네들 사이에서만 통용되었던 약조 수준에 머물렀을 터이다.
요즘 세태에서는 눈앞의 이익을 보고 의리를 잊는(見利忘義) 것이 당연한 듯 치부될 터이나, 군자는 이익을 보면 먼저 의리를 생각한다고 했다(見利思義). 나는 군자의 표상을 안중근에게서 확인한다. 그는 '견리사의(見利思義) 위기수명(見危授命)'이라 쓰고 나서 단지(斷指)한 손바닥으로 낙관 삼은 작품을 남겼다. 과연 그는 의리를 먼저 생각하고 위태로움 앞에서 목숨까지 바쳤는바, 위태로움이란 인간이 한낱 금수로 전락하고만 형국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태연하게 살인, 약탈, 전쟁을 저지르는 새로운 문명의 폐해는 인간의 도리가 내팽개쳐진 까닭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이와 맞서는 방편으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동양평화론'을 써 내려갔다.
군자의 의리는 특정 집단·세력의 틀 내에 갇히지 않고 보편타당한 세상을 향하여 뻗어 나간다. 스스로의 이익을 합리화하는 수준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인간과 사회, 역사를 탐구함으로써 지금보다 한 발짝 나아간 세계를 열어젖히려는 학자라면 마땅히 군자의 의리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른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는 이를 모르는 듯하다.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1970년대 이후 하버드대에 최소 수천억원을 후원하였는데, 그 덕에 마련된 것이 미쓰비시 교수이며, 램지어는 이러한 경로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학문의 자유를 절대선인 양 부르짖는 이들은 물질적인 조건을 애써 지워나가려는 경향을 드러내나, 언론에 소개된 램지어의 논문은 그의 물적 조건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수준이다.
2019년 발표한 '자경단: 일본 경찰, 조선인 학살과 사립 보안법'의 경우, 구체적인 비판에 직면하여 '일본 소식통에게 들은 소문에' 근거하여 작성했다면서 상당 부분 수정하겠노라 답했다고 한다. 2021년의 '태평양 전쟁 당시 성매매 계약'은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자료를 취사선택한 경향이 역력하다. 강압적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로 끌려간 유형이라든가,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던 유형은 일본 정부도 이미 인정했던 바다. 감언으로 위안부를 모집한 까닭에 계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사례도 상당수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도 램지어 미쓰비시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업자와 계약한 매춘부라 규정해 버리고 있다. 그러니 "한심한 결함이 있다"(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거나 "얼빠진 학술작품"(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 등 비판받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램지어 교수를 옹호하는 국내 연구자들이 있다. 이들은 램지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반학문적 행태라고 반박하는 한편, 더든 교수 등에게 "외부인들은 위안부 문제를 논할 권한이 없다"는 편지를 발송하였다. 그러면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거짓 증언자로 몰아붙이고 있다. 일본 극우화를 주도하는 사사카와 재단(Nippon Foundation)이 아시아연구기금을 출연하였고, 1995년 연세대가 이를 유치한 이래 적지 않은 국내 연구자들이 그 떡고물을 받아먹고 있는 현실을 나는 알고 있다. 램지어를 호위하는 국내 학자들의 의리는 이를테면 관우의 사당 앞에서 맹세하는 상인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태라 할 수 있겠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민교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