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901000392900018841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즉위해 69년째 재위를 이어가고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통치한 고조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63년 재위(1837~1901) 기록을 경신했지만 여전히 정정하다. 이런 엘리자베스 여왕도 한 미국 여인이 영국 왕실에 일으킨 초대형 스캔들이 아니면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1936년 서거하자 장남인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새 국왕은 즉위 직전 미국인 기혼녀 월리스 심슨과 깊은 관계였다. 영국 왕실은 심슨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8세는 심슨과의 결혼을 밀어붙였지만 영국은 물론 호주 등 영연방 국가 전체가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새 국왕은 즉위 1년도 안 돼 왕관 대신 사랑을 택했다. 왕위는 동생이 물려받으니, 그가 바로 영화 '킹스 스피치'의 말더듬이 국왕 조지 6세고, 조지 6세의 장녀가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큰 아버지 에드워드 8세와 미국 여인 심슨의 스캔들로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이 최근 미국인 손자 며느리 때문에 체면을 구겼다. 둘째 손자 해리 왕자와 메컨 마클 부부가 최근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영국 왕실의 인종차별을 폭로했다. 해리 왕자가 "아들이 태어났을 때 피부색이 얼마나 어두울지에 대해 (왕실 내부에서) 우려와 대화들이 오갔다"고 밝힌 것이다.

이들의 결혼은 마클의 이혼 경력과 흑백 혼혈 때문에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왕실은 마클을 가족으로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차갑게 대한 모양이다. 부부는 왕족의 명예와 권리를 포기하고 영국을 떠났다. 우리에겐 화제성 스캔들이지만 미국 언론과 영국 언론은 해리-마클 부부와 영국왕실 편으로 나뉘어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입헌군주제 국가는 왕실을 통해 국가 정체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태국에선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의 문란한 사생활로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는 민심이 커지고 있다. 생불로 추앙받던 푸미폰 국왕 시절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이어 그의 둘째 아들 해리 부부를 통해 드러난 영국 왕실의 폐쇄성과 순혈주의는 신성한 가면 뒤에 숨겨진 사악한 권력의 민낯을 보여준다. 21세기에 불가침의 절대 왕권을 인정하는 입헌군주제가 지속 가능할지 의문이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정당이든 맹종을 강요하는 모든 권력은 악이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