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재 정권과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는 남미 국가들에서 '인간 증발'은 심각하다. 2014년 멕시코에서는 임용 차별 철폐 시위를 벌였던 교육대학생들 43명이 체포된 뒤 한꺼번에 실종됐다. 멕시코 검찰은 마약조직이 이들을 살해한 뒤 소각했다지만 증거는 없었다. 1980년부터 2006년까지 100여개국에서 5만건이 넘는 강제 실종 사건이 UN에 보고됐다고 한다. UN이 2006년 '강제실종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강제실종보호협약)'을 채택한 이유다.
우리도 힘들었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공권력에 의해 사회로부터 강제 증발됐다.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증발됐다. 1991년 법원 선고로 사망이 확정됐지만, 그의 증발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1975년부터 부랑자 수용을 빌미로 운영된 부산 형제복지원은 12년 동안 많은 사람을 증발시켰다. 멀쩡한 사람을 부랑자로 낙인 찍어 강제수용했고, 513명이 복지원 울타리 안에서 사망했다.
최근 대법원은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장의 특수감금 무죄판결을 파기해달라는 검찰총장의 비상상고를 기각해 피해자들이 피눈물을 쏟았다. 부산형제복지원 사건을 계기로 우리도 강제실종보호협약에 가입한다지만, 이제 우리 사회에서 강제실종을 실행할 권력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범죄에 의한 인간 증발 사례는 종종 발생한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증발'은 2000년 발생한 최준원(당시 4세)양 실종 사건을 다뤘다. 딸의 생존을 굳게 믿는 아버지는 딸 찾기를 멈출 수 없다. 1991년 증발한 대구 개구리 소년 5명은 11년 뒤에야 참혹한 유골로 돌아왔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풀리지 않은 의문에 가족들이 악몽에 갇혔을 것이다.
구미 학대 사망 아동의 친모가 외할머니라는 충격적인 유전자 조사 결과로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문제는 사망 아동의 엄마가 아니라 언니로 밝혀진 여성이 출산한 딸이 감쪽같이 사라진 점이다. 현행 의료 및 행정체계에서 신생아들이 뒤바뀌고 증발하는 일이 가능하다니 가슴이 서늘하다. 세간의 관심은 엄마의 딸이, 딸의 딸로 바뀐 패륜의 전말에 집중한다. 하지만 경찰이 가장 집중할 일은, 딸이 출산한 뒤 증발된 아동의 신변을 확보하는 것이다. 아이가 안전하게 발견되길 바란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