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소유·충족에 저당잡힌 삶
무소유를 실천한 '월든' 작가 소로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강력 메시지
나의 행복은 어디에 머무는가?
삼월의 말미, 이른 아침 햇살과 함께 드러내는 목련 봉오리, 때 이른 봄꽃 소식에 마음 한편 잠잠히 감사와 안도의 숨이 솟는다. 행복은 감정의 상태적 발현으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함'이란 사전적 의미를 지니며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서 정치사상이나 고전적 체계에서도 인간에 있어 궁극의 목적이었다.
지금 당신은 행복한가? 실로 많은 이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흔쾌한 대답을 듣는 것은 나의 기대일 뿐이었다. 좀 더 많은 소유와 충족이 행복이란 또 다른 문화로 정착된 지금 상대적 결핍과 함께 그 존재가 무색해졌고, 구심점이 부로 연결된 삶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되어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저당잡고 있다.
'월든'의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진정한 자유를 꿈꾸며 월든 호숫가에서 2년여에 걸쳐 자급자족의 자연인으로 무소유의 삶을 실현했다. 19세기 초 미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였던 소로는 호숫가에 손수 오두막을 지었고 이때 지출한 건축비는 28달러,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어떤 건축물보다 위대한 모험으로 이어지는 이 사건의 월든 호숫가 집은 그의 걸작의 산실이 되었다. 당시 미국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집의 노예, 재산의 노예, 일의 노예였다. 물질로 향한 나의 욕구, 객관화되는 삶의 방식과 타인의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것과 자본에 종속되는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에 던지는 강력한 경고를 메시지에 담아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이 회자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욜로족이나 귀촌의 등장 역시 '간소하라! 진실하라! 자연을 벗하라!'는 그의 외침과 연관 있음은 아닐는지. 무엇이든 소유하려면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의 대가는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삶과 소유 사이에 서 있다.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책임일 것이다.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의 창조자임을 언급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 초절주의나 형이상학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복에 관해 자신만의 해답을 찾게 되길 제언해 본다. 삶의 철학에 녹아든 행복이란 명제 앞에 철저하게 주관적인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고(에이브러햄 링컨),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가는 지혜로움으로(제임스 오펜하임)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퍼블릴리어스 사이러스) 일을 놀이로 즐긴 에디슨의 삶의 철학으로 거듭나길.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되는 지혜로움과 함께 나의 생에 뿌리깊은 나무로 나의 지경을 넓혀간다면, 그래서 그런 나의 시간들이 스스로 인정과 자긍의 자양분으로 순환될 수 있다면 온전한 존중으로 이어져 자신다움이 발현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의 소극적 대화를 거론치 않더라도 자신의 내적 무지로부터 깨우침의 소중함으로 이어져 자신을 알아가는 질문으로 의미를 더해 간다면 자신만의 진정한 모습과 함께 주관적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리라.
나의 행복은 어디 머무는가? 불볕 태양 아래 바람을 이는 푸른 빛 해송이어도, 탄도에 숨죽여 피어나는 야생화 한송이어도 좋다. 무엇이든 나다움으로 선택하는 나의 삶이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삶은 매 순간으로 이어지는 과정(Process)임을 깨닫는 지혜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가치와 의도대로 선택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세상을 밝히는 빛은 별빛도 방안의 불빛도 아닌, 나, 너, 우리, 77억개 우리 자신의 행복의 빛이 아닐까?
/정백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코칭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