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리다 어제보다 흐린 오늘 꽃이 떠나고 있다 네 슬픈 눈시울처럼 붉어진 흰 꽃잎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있다 나 여기 레테의 강 건너 네 곁으로 왔단다 함께 있는 때만이라도 즐겁기로 했었지 약속을 어긴 건 당신이에요 너는 말하는데 꽃나무는 말이 없다 책을 읽어야겠지 상처 다스리는 법이 페이지마다 씌어 있지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 들어가 비밀스레 나의 모더니즘을 읽는다 꽃잎처럼 흩어진 시간 끝에 선다 벼랑 끝에 바람이 분다 생은 스러지기 전에 크게 한 번 빛나는 벚꽃 잎 떠난 자리에 황토비 내리겠지 너 떠난 자리에 칠흑이 서겠지
방민호(1965~)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3월 말부터 개화하는 벚꽃은 한순간 눈을 멀게 한 사랑처럼 왔다가 간다.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어제 피어나 기다려주지 않고 오늘 떠나간다. 어느새 눈 감았다가 뜨고 나면 사라지는 꿈처럼, '슬픈 눈시울처럼 붉어진 흰 꽃잎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망각의 강에서 와서 왔던 곳으로 사라진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 동안 기억의 '페이지마다 씌어 있는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서 언제든 찾아오는 당신은 언제나 새롭다. 당신과 함께한 '꽃잎처럼 흩어진 시간 끝에서도, 벼랑 끝에 바람이 불 때도, 우리의 생은 스러지기 전에 크게 한 번 빛나는 벚꽃'이었지 않던가. 그렇게 '잎 떠난 자리에' 흘린 그 눈물이 버찌가 되듯이. 이제 꽃비로 상처를 마감하는 벚꽃은 꽃말처럼 '순결'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