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에 방점 찍어야
재앙과 폭력에 고통받는 사람들
비극으로 내몰리는 사람들 못보고
앞으로만 달리는 우리 현실 가리켜
한 사내가 눕는다. 어느 날 느닷없이 눕는다. 쓰러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운 것이다. 연극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사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뿐이다. 1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누워서 연극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사내가 눕자 가족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내가 생계를 꾸려야 한다. 경력 단절로 인해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온갖 일을 다 해 보지만 생활은커녕 생존하기도 힘들다. 아내가 사내에게 말한다. "대출금이라도 갚고 눕든가." 하지만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들은 고등학생이다. 입시 준비에 차질이 생겼다. 도저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이 말한다. "아저씨가 차라리 나아요."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든 아들도 눕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아들에게 사내가 말한다. "너도 곧 어른이 되겠구나. 너무 무리는 하지 마라."
연극 'X의 비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X에 대해. X는 누구일까.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을 붙이는 게 규칙이다. 안티고네, 햄릿 그리고 오셀로. 이런 식이다. 사내에게 이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강현서. 왜 '강현서의 비극'이 아닌가. X의 자리에 누가 오더라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모두가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다음으로 비극에 대해. 비극은 몰락으로 인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주어진 운명의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맞서는 인물이 보통이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은 취약하기는 하지만 나약하지는 않다. 나약한 인물이 아니어야 하는 까닭은 그가 운명에 맞서야 할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약한 인물로는 사건을 만들 수 없다. 취약한 인물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몰락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다. 완전무결한 인물이 몰락하는 이야기는 공감하기 어렵다.
연극 'X의 비극'은 한 사내에 관한 비극이 아니다. 사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다. 1년이 넘도록 누워 있는 것은 얼마나 강력한 행동인가. 문제는 그 어떤 행동보다도 강력한 이 행동이 사건의 전부라는 데 있다. 사내는 누워버렸기에 사건을 만들 수 없다. 사건은 그를 둘러싼 다른 인물이 만들게 된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은 마치 소설의 서술자처럼 여러 인물이 독백처럼 읊고 있는 대사로 넘쳐나게 된다.
내레이션처럼 울려 퍼지는 대사는 사내가 아닌 사내가 누워버린 상황을 보게 한다. 인물이 아니라 인물을 감싸고 있는 환경을 보라고 강요한다. 제목에 붙은 비극이 의미하는 바가 그 환경의 구조가 지닌 폭력에 대한 환기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저 그 강력한 구조의 그물에 포획된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 틀 안에서 옴짝달싹하기조차 힘겨운 때가 태반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사내가 중요하지 않다. 상황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강현서가 아닌 X인 것 아니겠는가. X의 자리에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누가 놓이더라도 크게 다를 것이 없기에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연극이 시작하면서 사내는 말한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사내가 누우면서 한 그 말은 '살고 싶지 않다'에가 아니라 '그렇게'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렇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재앙과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진정 비극으로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앞으로만 달려가는 우리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 모두 그 '삶의 열차'에 타고 있는 것이라고 연극 'X의 비극'은 말하고 있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