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앞바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겠지만, 9~10m 정도나 하는 조수 간만의 차가 있다는 부분을 빼놓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큰 조수 간만의 차는 작은 어선 하나도 배를 대기 어려운 상황을 만듭니다.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 때문이죠. 하지만 인천항에선 100년 넘게 대형 화물선을 비롯한 다양한 선박이 특별한 문제 없이 여객이나 화물을 싣거나 내리고 있습니다.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는 특별한 장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갑문'입니다.
갑문은 다른 두 개의 수면 사이를 선박이 안전하게 통행하도록 만든 시설입니다. 갑문은 바다와 내항 사이에 설치돼 바다의 물때와 관계없이 배가 내항을 오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바다 수위가 낮은 썰물일 때 선박이 내항으로 진입하려고 하면, 갑문에 물을 채워 내항과 수위를 맞춰 배가 내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반대로 배가 내항에서 바다로 나갈 땐 바다의 수위에 맞춰 배가 목적지로 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선박의 엘리베이터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죠.
■30분~1시간이면 'OK'
인천항에 설치된 갑문의 무게는 1천t이 넘는다고 합니다. 미닫이 방식인데, 이 문을 열고 닫을 때에도 사고가 일어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배가 갑문으로 진입할 때 주변에 경고음이 울리는 이유기도 하죠.
배가 갑문에 진입하면 열렸던 갑문이 닫히고, 배를 밧줄로 고정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내항과 바다의 수면을 맞추기 위해 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배가 흔들려 갑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인천항 갑문은 최대 길이 306m, 너비 32m를 가진 선박이 이용할 수 있는 5만t급과 길이 215m, 너비 19m 선박이 이동하는 1만t급 등 총 2개의 갑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5만t급 갑실은 물을 채우는 데 40분~1시간, 1만t급 갑실은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인천 앞바다의 물때와 관계없이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정도의 시간만 기다리면 언제든지 인천항을 드나들 수 있는 겁니다.
■늘어나는 물동량. 갑문의 변신
지금의 인천항 갑문은 1974년 만들어졌습니다. 그 전에도 갑문이 있었는데,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늘어나는 물동량을 감당할 수 없어 새로 지어졌습니다. 당시 상황을 조금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우리나라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 추진되면서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당시 연 7~8%의 고성장을 기록했는데, 이 시기 인천항의 물동량 증가율은 이를 뛰어넘는 평균 20%대를 나타냈습니다. 서울 구로와 인천 부평, 주안 등에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차례로 조성된 영향이 컸습니다. 공단에서 사용할 원자재 수입이 대부분 인천항에서 이뤄진 것이죠. 1960년 46만t 규모였던 인천항 물동량은 1969년 6배 이상 되는 279만t 규모로 늘어납니다.
기존 갑문 안쪽 인천항 시설은 4천500t급 3선석에 불과해 이렇게 급증하는 물동량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갑문의 탄생엔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기존 갑문은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현재 내항 1부두 주변에서 일부 흔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상태라고 합니다.
▶ 쉽게 보는 갑문의 작동 방식
■ 수탈의 아픔 가진 갑문
지금 바닷속에 있는 인천항 갑문은 1918년 설치됐습니다. 1911년부터 7년 정도 공사를 했는데, 지금 돈으로 3천억원 정도의 사업비가 투입됐다고 하니 당시 대규모 공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만큼 꼭 필요했던 시설이었다는 의미일 텐데, 왜 그랬을까요. 당시가 일제 강점기라는 점이 힌트가 될까요.
인천항은 군산, 부산 등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쌀과 콩을 수출하는 항구 도시였다고 합니다. 일제는 이런 곡물 자원을 더욱 편리하고 빠르게 자국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고, 그 답이 갑문이었던 것이죠. 갑문 조성으로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4천500t급 대형 선박 3척이 24시간 정박할 수 있게 됩니다. 인천항 갑문 준공식은 본격적인 수탈을 예고하듯 제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 등 700여 명의 관계자가 참석해 대대적으로 열렸다고 하네요.
■ 백범일지에도 기록된 강제 노역
인천항 갑문 조성 공사엔 조선인이 동원됐습니다. 노역은 무척이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인천 내동에 있던 경성감옥 인천분감에 수감된 조선인들이 상당수 끌려갔는데, 그중엔 백범 김구(1876~1949)도 있었습니다.
김구는 1911년 안악사건(1910년 안명근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서울에서 옥살이를 합니다. 1914년 39세 때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축항 공사 현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백범일지에 당시 노역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아침 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매고 축항공사장으로 출역을 간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일 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그러면 같이 쇠사슬을 맨 죄수들도 함께 바다에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참고 일했다.'
그 역사의 현장은 현재 내항 1부두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쪽 석축 위로 정박한 배를 묶어 두는 계선주가 지금도 열을 지어 서 있습니다.
■100년의 역사 지속하는 갑문
1974년 인천항 갑문이 새롭게 모습을 바꾼 이후 인천항은 컨테이너 하역 전용부두인 4부두를 포함해 2부두와 3부두 등 5만t급 대형 선박들이 동시에 접안해 하역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게 됩니다. 안정적인 하역 환경 조성으로 물동량 소화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1979년 인천항의 물동량 처리량은 2천400만t에 달합니다. 10년 전 처리했던 물동량이 279만t 수준이었다는 걸 앞서 설명드렸는데, 10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입니다.
1980년대, 갑문은 항상 배들로 가득했다는 게 당시 근무자들의 설명입니다. 갑문 이용을 위해 대기 중인 선박이 항상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하루 50척의 선박이 드나들 수 있던 갑문에 58척의 선박이 통항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인천항 갑문을 입출항하는 선박은 2005년 1만3천140척으로 최고점을 찍습니다. 2004년 남항 개항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겁니다. 벌크화물 하역항인 북항이 개항한 2010년엔 8천395척으로, 송도 신항 개항으로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내항 4부두가 가동을 중단한 2017년에는 5천52척으로 갑문 입출항 선박이 줄어듭니다. 2005년에 비해 60% 이상 줄어든 숫자이죠.
이런 상황에서도 갑문으로부터 시작되는 내항은 24시간 해수면 높이가 일정하고 물이 잔잔해 정밀기계나 자동차 하역에 적합한 항구로 평가받으며 100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지만, 조선인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한 인천항 갑문. 인천항 갑문이 가진 의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