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민주항쟁 불꽃 피워올린 날
시인 기형도는 1년후 기자로 광주행
어머니와 만났으나 묘역 인상만 기록
추후 표제작품 '입속의 검은잎' 내놔
김숨 'L의 운동화'도… 잊히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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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는 지난 1987년 6월9일에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동판이 하나 새겨져 있다. 2016년 6월9일 이한열기념사업회가 제작한 이 동판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바닥에 새겨져 있어서 누구든 걸으면서 바라볼 수 있다. 당시 이 대학 2학년생이었던 이한열은 오후 5시쯤 쓰러졌다. 동판은 이 쓰러짐이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고 적고 있다.

오늘, 무심하게 찾아온 6월9일은 이제 그날로부터 34년을 넘어서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 어디선가 받았을 헝겊 조각 한 장을 간직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가 쓰러지면서 친구에게 안겨 있는 그 유명한 장면이 판화로 새겨져 있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문구가 아래쪽에 적혀 있다. 장례식 때 가슴에 달았던 듯하다.

시인 기형도는 언론사 기자로 일할 무렵인 1988년 8월 초에 광주 망월동 묘지에 들른다. 그의 산문 '짧은 여행의 기록'은 '1988년 8월2일 저녁 5시부터 8월5일 밤 11시까지 3박 4일간'을 기록한 노트인데 그 끝 무렵에 광주에 간 기록이 남아 있다. "무명 열사의 묘, 박관현의 묘, 묘비명 사이를 걸으며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묘원은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였으며 열사(熱沙)였다." 그는 묘원에서 나와 봉고차에 올라탔는데 아낙네 한 분이 어린 소녀와 함께 올라타게 되어 우연하게 합석을 하게 된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여인은 "파마 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 초점이 흐린 눈동자, 검게 탄 피부, 가는 몸매, 흰 반팔 남방, 갈색 면바지, 굽 없는 흰 샌들을 신은 촌부"였다. 봉고차 기사가 "이한열 어머니예요"라고 말을 건네자 기형도는 좌석 앞으로 다가가 "한열이 선뱁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여인은 늙고 지친 얼굴로 "이따금 이곳에 다녀갑니다"라고 쓸쓸하게 대답한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였다. 1940년생이니 그때 그분은 우리 셈법으로 49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백발 가득한 초로(初老)의 여인으로 담담하게 묘사된다. 이렇게 우리는 기형도의 기록을 따라, 1988년 한여름에 아들 묘역을 찾아온 어머니의 발길을 따라, 찌들고 갈라지고 검게 타고 늙고 지친 한 시대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광주에서 망월동 묘지에서 자신의 대학 후배인 한열이의 어머니를 만난 기형도는 광주 시내로 들어와 이렇게 쓴다. "나는 금남로 입구에서 내렸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무등은 구름 속에서 솟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걸었다. 어깨에 둘러멘 가방이 대리석처럼 무거웠다." 그때 한열이 어머니는 "1년 전이지요. 7월5일이에요. 3남매 중 큰아들이지요"라고 한숨을 토하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멋모르고 캔만 빨아먹는 어린 소녀의 손을 힘들여 쥐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과 구름 속으로 몸을 가린 무등(無等) 뒤로, 바로 전 해인 1987년 7월5일에 죽은 큰아들을 말하는 어머니의 한숨과 중얼거림이 애잔하게 지고 있었다. '기자 기형도'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묘역의 인상만 기억 속에 썼지만, 광주에서 한열이 어머니를 만난 후에 비로소 '시인 기형도'로 몸을 바꾸어 나중에 유고시집 표제작이 되는 명편 '입 속의 검은 잎'(1989)을 쓴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라는 문장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울려온다. 그 활자들에는 이한열과 광주가 아프게 겹쳐 있었다. 2016년에 쓴 김숨의 장편소설 'L의 운동화'는 이한열의 운동화를 통해 한 시대의 슬픔과 고통을 들려준 아름다운 작품이다. 운동화 한 짝이라는 개별 사물이 시공을 뛰어넘어 역사적 상징으로 기억되어가는 과정을 복원한 작가는 애도와 기억의 윤리학이 왜 우리 역사에서 끊임없이 요청되고 있는지를 이한열 시대의 삶과 죽음, 일상과 역사 속에서 묻는다. 그렇게 기형도로부터 김숨까지 이어져간 이한열에 대한 기록이, 동판의 표현처럼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으로 기억되어, 무심한 역사 속에서도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