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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성향에서 주목받은 '20대 男'
무명 걸그룹에게 "포기하지 마라"
응원 메시지 '역주행' 가능케 해줘
열광속 그들의 분노·슬픔 느껴지며
터널 끝 '빛' 잡고픈 소망 안쓰러워


사본 -김별아사진
김별아 소설가
일주일에 두 번 참여하는 근력운동 교실에서는 유산소 운동을 할 때 신나는 음악을 틀어 수강생들을 독려한다. 대부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마련인데, 얼마 전부터 귀에 꽂히는 노래 한 곡이 있었다. TV채널을 돌리다가 수차례 들었고 노래를 부른 그룹 멤버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았다. 귀를 잡아끄는 가사의 반복과 가오리처럼 펄럭이는 춤. 4인조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롤린(Rollin')'이다.

"롤린 롤린 롤린, 롤린 롤린 롤린~"

2021년 1월부터 3월까지 아이돌 그룹 8개와 60명의 멤버가 가요 시장에 새로 나왔다. 코로나19 상황에 단 석 달 만인데도 그만큼이다. 아이돌을 꿈꾸는 연습생만 100만명에 이른다니 짐짓 많은 듯해도 그들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에 성공한 셈이다. 피나는 노력과 행운 둘 다 필요한 일이래도 데뷔 후 모두가 방탄소년단이 되는 건 아니다. 화려한 무대에서 반짝이는 스타들의 뒤에는 좌절하고 사라진 수많은 무명이 있다. 연예 매니지먼트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된 대중문화 시장에서 실력이 있어도 자본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름을 알리기는커녕 무대에 서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게다.

2011년 데뷔한 브레이브걸스는 2016년 팀을 현재의 멤버로 재구성한 것까지 포함하면 10년 가까이 무명으로 보냈다. 무명은 이름(名)만 없는 것이 아니라 빛(明)이 없는 깜깜 지경과 같다. 가난과 소외, 실의와 좌절은 세상의 모든 무명이 겪는 일이다. 브레이브걸스 또한 지난해 3년여 만에 새 앨범을 냈을 때까지만 해도 영영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스러질 줄 알았다. 그러다 갑자기,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그들 앞에 번쩍 빛이 비추었다. 숙소에서 짐을 빼고 소속사와 활동을 정리하기로 한 바로 전날, 유튜브에 댓글 모음 영상이 올라온 것이다.

여기까지는 희귀하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행운에 가까운 스타 탄생 스토리다. 문제적인 점은 그 기적적인 '역주행'을 가능하게 만든 브레이브걸스의 주요 팬층인 '이남자'다. 20대 남자, '이남자'는 정치 성향에 대한 여론 조사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난봄 재보궐 선거를 통해 한국 사회의 변수로 부각된 집단이다. 20대는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의 정당을 지지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이남자'는 이른바 진보를 표방한 정권에게서 등을 돌렸다. 보수화, 공정세대, 반(反)페미니즘, 여성혐오, 세대갈등 가설 등등, '이남자'의 정체를 놓고 온갖 가설이 분분했다. 각종 설문조사를 통해 드러난 그들은 '남성 차별'을 느끼는 첫 번째 세대다. 하지만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여성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의 문제다. 그들은 힘이 없다. 힘이 없다고 느낀다.

어쩌다가 '브레이브걸스'가 '이남자'의 강력한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어둠을 뚫고 솟구친 걸까? 우리 집에 사는 내가 낳고 기른 '이남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일말상초(일병 말 상병 초)에 군대 내무반에서 '브레이브걸스'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외롭고 막막한 시기, 열망과 욕망이 통제된 상황에서 들었던 노래는 '이남자'의 기억에 각인되었다. 전역 후에도 취업난과 부동산 폭등에 직면한 그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걸 희망이라곤 위태로운 암호화폐 정도뿐이었다. 지난 시절 '이남자'가 사랑했던 '브레이브걸스'가 국군장병 차트인 '밀보드(밀리터리+빌보드)'를 통해 다시 떠오른 건 그때였다. '이남자'는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조회수 1천만의 역주행 영상을 클릭했고, '브레이브걸스'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승리라는 대답을 온몸으로 실현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응원이기도 했다.

모든 세대가 각자의 짐을 지고 간다. 하지만 지금 '이남자', 그리고 모든 청춘의 짐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못난 기성세대가 떠넘긴 것이기도 하다. '브레이브걸스'에 열광하는 '이남자'를 보면 무력감에 빠진 그들의 분노와 슬픔이 느껴진다. 동시에 터널의 끝에서 기어이 빛을 잡고픈 간절한 소망이 읽힌다. 안쓰럽고도, 미쁜 일이다.

/김별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