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대형참사 등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
이 상황 타개하기 위해 법 조항 촘촘히 짜고
CCTV 확충보다 부끄러움 회복이 더 중요
열 가지 좋은 일보다 한 가지 나쁜 일이 없으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가족이 무탈하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다가도 문득 현실과 마주치게 되면 노후대책이 조금 확실하게 있었으면 좋겠고, 자녀들이 괜찮은 직장을 갖고 앞가림을 하고 또 뭐가 어쨌으면 좋겠고 하면서 자잘한 바람들이 자꾸 추가되어 삼락(三樂)을 훌쩍 초과하게 되니 군자로 살기는 영 틀렸다.
그런데 이것이 꼭 내 탓만은 아닌 까닭은 지금은 경제적 가치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물신주의 시대이기 때문인데, 평생을 출가수행자로 사신 분은 현재 사회가 선천의 음 시대를 지나 물질이 개벽된 양 시대이기 때문이기에 더 그렇다고 설명하신다.
알다시피 한국의 민족종교들은 19세기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같은 내우(內憂)에 제국주의의 침탈이라는 외환(外患)의 상황에서 민중적 갈망과 불안을 치유하는 대안으로 등장했다.
특히 동학에서 시작된 개벽 담론은 후속주자인 증산교·대종교·보천교·원불교 등 신종교의 핵심 교리로 자리 잡게 된다. 하늘과 땅이 새로 열린다는 개벽사상은 우주질서를 재편하는 삼계개벽(三界開闢), 문명개벽(文明開闢)에 개벽사상의 결정판인 정신개벽론(情神開闢論)으로 발전한다.
이들 개벽사상의 공통점은 억압되었던 것들이 주인이 되고 삐뚤어진 우주의 질서가 바로 선다는 것으로 과학문명과 정신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약자(弱者)가 주체가 되며, 겸양이나 부끄러움보다는 적극적인 것이 환영을 받는 양시대(陽時代)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시대가 도래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부작용도 있다.
어느새 우리는 겸양이나 사양지심을 미덕이 아닌 내숭이나 답답함의 대명사로 간주하게 되었고, 부끄러움이 인정받지 못하는 부끄러움의 부재 시대가 된 것이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 인면수심의 성폭력 사건,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내로남불, 하청에 재하청으로 기어이 대형 참사로 이어지고만 광주의 건물붕괴 사건, 원산지를 속이거나 불법 투기로 많은 이들의 근로의욕을 꺾는 행태, 일상에 만연한 금융사기 등 모두가 부끄러움의 실종 내지 부재가 빚어낸 사태들이다.
용장오도(龍場悟道)라고 귀양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양명학을 일으킨 왕양명의 핵심 사상의 하나로 양지론(良知論)과 치양지(致良知)를 들 수 있다. 요컨대 본성과 상식의 회복을 주창한 현인들의 이 가르침을 함께 공유하고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하늘을 속이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려도 결국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는 못하는 법이다.
자기의 본마음과 양심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러움을 회복하는 것이 참으로 종요롭다.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부끄러움을 잃은 극소수의 범죄자들로 인해 법 조항이 더욱 더 많아지고 촘촘해졌다. 심지어 은행 현금 입출금기도 더 절차가 많아지고 복잡해졌다. 극소수의 범죄(자)로 인해 수많은 평범하고 정상적인 보통사람들이 더 불편해져야 하는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법망을 촘촘하게 짜고 CCTV를 늘리는 게 아니라 우리 고유의 미덕이고 문화였던 부끄러움을 회복하는 일이 더 관건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의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매일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를 보면서 부끄러움의 사회적 회복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