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어두운 잔재 돼 버려
청평호반은 수상관광자원 풍부
수변휴양지로서 값어치 높지만
근로보국대 44인 애절함 고스란히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초기 인천에 있는 군수공장 전력 공급이 다급해지자 북한강 유역에 청평댐 건설을 시작했다. 수도권에 가깝고 산세가 가파른 북한강 유역에 댐을 건설하기 위해 가평군민들의 노동력이 대거 동원되었다. 1938년 대동아전쟁을 독려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하고 지역마다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했다. 가평군에서는 학생, 여성, 농부에 이르기까지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댐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공사에 소요되는 모래와 자갈을 일일이 물로 씻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그 결과 가평군민들 중에서 공사에 참가한 근로보국대 노동자 44명이 희생되었다. 기록으로 남은 희생자가 44명이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부지기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평댐관리소 안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공난자공양비'라는 기념비가 남아 있다.
청평댐이 건설되기 전 북한강은 오랫동안 춘천에서 인천까지 수운을 연결하는 수상교통로였다. 고려 말부터 1천300여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북한강 뱃길 굽이굽이마다 아름다운 마을과 포구, 뱃사공들이 생겨나고 또 소멸했다. 청평호반은 원래 청평제(淸平堤)라는 저수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북한강에서도 가장 유려하고 아름다운 뱃길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청평댐이 준공되던 1943년 이후 청평제는 거대한 인공호수로 변했다. 세월이 흘러 주변에는 분위기 좋은 수변산책로가 생겨나고, 식사와 차를 즐기는 수변 휴식공간이 조성되었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계곡들은 명경지수에 기암절경을 만들어냈다. 대규모 유원지가 생겨나고 수변계곡을 따라 음식점, 숙박시설, 수상레저 등 위락시설이 들어서더니, 덩달아 전직 대통령, 장관, 부호들의 별장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청평호반의 담수위가 높아지자 설악면 꼭짓점에 자리한 울업산은 물길이 3면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등산마니아들이 찾는 명산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선들이 바둑을 두며 놀았다고 하는 신선봉 정상은 동남쪽으로 장락산, 왕터산을 아우르고, 강 건너편 북쪽으로는 멀리 화악산과 명지산을 유려한 청평호반과 함께 관조할 수 있는 산악수상 관광명소가 되었다.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2004년)에 포함되어 있는 청평댐은 대한민국 산업근대화에 제일 먼저 공헌한 유물이다. 산업구조물인 교량, 터널, 굴뚝, 담장, 철도시설물, 댐, 저수지 등 총 29개의 경기도 근대산업유산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청평댐이 가장 먼저 건설되었다. 그래서 청평댐은 일제강점기 근대화 과정에 최초로 공헌한 근대산업유물로 기록되어 있다. 산업근대화가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안타깝게도 청평댐은 인류문명사의 밝은 유산이 아니라 식민지사관의 어두운 잔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해마다 장마 때가 되면 춘천의 소양댐, 의암댐과 함께 댐의 수문개방 조절 협조문제로 인하여 북한강 수변생태관광지인 자라섬이 물에 잠겨 범람하는 이슈가 발생하곤 한다.
관광전문가 관점에서 보면 청평댐 건설 덕분에 조성된 청평호반은 가평 8경 중 으뜸가는 제1경으로 지정될 만큼 수상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하다. 가평군 생태관광지 중에서 산과 강이 조화롭고 경관이 아름다워 수변휴양지로서의 값어치가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관광지 이면에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가평군민들의 애환이 청평댐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서려 있다.
청평댐과 청평호반을 지나칠 때마다 일제강점기 중노동의 고통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가평군 근로보국대 44인의 애절한 역사가 청평댐 콘크리트 구조물과 함께 클로즈업되곤 한다.
/이상용 가평군청 관광과 전략사업TF 팀장·경영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