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화 배분 갈등 기준조차 합의 난감
내년 대선후보 모두 '공정' 말하지만
잘 구축 한들 '정교한 아귀다툼의 틀'
성찰·타인·자연에 대한 사랑이 먼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과연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인간과 자연 사이로만 한정되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과학적인 사고는 근대 사회를 구축하는 원리로 작동하였고, 이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또한 과학적으로 설정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도구적(과학적) 지식에 근거하는 한 초점은 재화의 획득과 배분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이성을 갖춘 개인들이 서로 계약을 맺으니 일견 지배·피지배 관계로부터 벗어난 듯 보이기도 하나, 계약 당사자들은 상대보다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기 위하여 도구적 지식으로 무장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졌으며, 계약의 조건 및 도구적 지식의 소유 수준은 불균등한 것이 현실이었다. 예컨대 생산수단을 차지한 자본가가 개별 노동자보다 우월한 조건에서 계약이 맺어지지 않겠는가. 마르크스주의는 이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으로 지배·피지배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 사상이 근대 과학주의와 맞서는 방식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과학주의였던 셈이다.
속물화된 세계에서 인간은 타인을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취급하게 된다. 마르틴 부버는 이를 '나와 너'의 관계가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하였다고 지적하였고, 에리히 프롬은 소유 양식의 삶 대신 존재 양식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근대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근대 종언 담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는데, 193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졌던 '네오 휴머니즘 논쟁'은 그러한 영향 아래서 빚어졌다. 과학이 신이라는 우상을 허물고 인간 중심의 세계를 열어젖혔으니 근대 휴머니즘이 성립했다는 것. 그런데 과학은 이제 중세의 신을 대체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우상으로 군림하게 된 까닭에 새로운 휴머니즘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김오성, 김동리가 당시 근대 과학주의를 맹렬하게 공박했던 비평가였다.
최근 몇 년 공정 담론이 급격하게 부각되었다. 내년 치러질 대선에 후보로 나선 이들은 거의 모두 공정문제를 끌어안고 있다. <대선 출마 선언문, '공정·경제' 있고 '기후·차별금지' 없다> 지난 7월6일자 '경향신문' 머리기사였다. 읽다 보니 문득 근대 과학주의의 내력이 떠올랐다. 공정 담론을 둘러싸고 몇 가지 물음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교육으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주장할 때, 교육조차도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몰각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갈등에서 공정 담론은 을의 조급하고 배타적인 욕망 표출에 머물렀던 것은 아닐까. 간접고용이 직접고용으로 바뀜으로써 상시 해고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업무 내용과 임금 수준은 그대로였으니, 이조차 허용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은 비정규직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저주일 따름이다. 법정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이 진학 과정에 쌓았던 여러 스펙들도 그 기회가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허용된 것은 아닌 듯하다.
누구나 공정을 떠들 수 있지만, 공정은 그 기준조차 합의하기 난감할 수밖에 없다. 재화의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정이 험난하더라도 공정 담론을 발전시켜야 하겠지만, 공정 담론이 아무리 탄탄하게 구축된들 우리 사회가 그리 행복해질 성 싶지는 않다. 그래 봐야 겨우 아귀다툼의 틀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었을 뿐 우리가 아귀다툼에 포박된 형국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기에 하는 말이다. 공정 담론이 의미를 갖추려면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타인·자연에 대한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오래전 성리학자들이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가치를 내세웠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성인의 길을 좇아 덕성을 닦으면서 사회 질서를 바로 잡는 데로 나아가라는 것이 우리 선인들의 가르침이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민교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