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C 스코틀랜드 시작 유럽서 전파
중요한 이념 중 하나인데 파산상태
촛불시민 염원은 시나브로 꺼져가고
정치·경제·사회 개혁은 점차 사라져
코로나19는 끊임없이 경고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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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모든 현상은 명백하게 외치고 있다: '자유주의는 실패했다'. 17세기 이래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하여 유럽세계가 전파한 근대의 가장 중요한 이념 가운데 하나가 파산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 까닭은 자유란 말에 담긴 이중적 의미 때문이다. 자유(freedom)는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의 자유를 의미한다. 또한 두려움과 공포, 폭력과 억압에서의 자유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몇 가지 가치를 꼽으라면 자유란 말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모든 종교와 예술, 학문은 물론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은 자유 없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선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동어반복일 뿐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까닭은 자유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liberalism)는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행사하는 특정한 주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장의 자유란 말은 정치경제적 맥락에서의 자유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며, 해고의 자유는 경영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일 뿐이다. 공산주의는 정치경제적 맥락에서의 자유보다 사회적 맥락에서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주장을 펼치는 이념 체제이기에 자유주의의 가장 큰 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맥락에서 1980년대 이후의 대처리즘을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이유도 그들이 사회와 복지를 강조하는 수정 자본주의를 뒤집고 시장과 규제의 자유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세계화와 자유가 결국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말인 까닭도 여기에 있으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연대와 공생, 공정과 공동선을 강조하는 사회윤리적 주장을 공동체주의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국사회에서 자유란 말이 혼란을 초래하는 이유는 이 두 개념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장이나 규제의 자유를 외치는 이들은 결코 실존적 맥락에서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자유를 보기에 공동선이나 공동체적 맥락에서의 자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자유를 훼손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자유와 자유주의를 구별하지 못하기에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파산을 선언한 자유주의를 맹종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시장과 규제에서의 자유, 자본의 자유에 지나지 않기에 오히려 실존적 자유와 공동체적 자유를 부정하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공동체주의는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공동체주의 논의가 활발한 까닭을 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보수세력들이 자유주의의 역사적이며 정치사회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유독 자유란 말을 애호하는 까닭은 기득권을 위한 방종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중도보수인 까닭도 그들 역시 자유주의적 맥락에서의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은 지금 거대한 전환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생태계 파괴로 인해 초래된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그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이 기후파괴와 함께 세계적으로 악화일로에 있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수정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더 늦으면 우리 문명과 세계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일시적인 경제적 풍요에 젖어 권력 다툼만 벌이고 있다. 그 풍요가 우리 사회를 심각하게 분열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임에도, 목소리 높은 이들은 자신이 지닌 한 줌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다. 정치가와 관료들이, 경제권력들이 그들이며, 그 달콤함을 얻지 못해 안달하는 기득권층 언론과 위선적 지식인들이 그 뒤를 받치고 있다.

촛불시민의 염원은 시나브로 꺼져가고, 정치, 경제, 사회개혁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나마 능력에 따른 공정함이라도 보장하라는 미소한 외침이 들릴 뿐이다. 사회 분열은 가속되고 있고 사람들은 아프다고 외치는데 들으려 하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삶을 바꿔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죽어갈 것이다." 실존의 자유를 원한다면 사회의 자유를 규제하라. 자유는 자유의 이름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