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불로 잿더미 된 숲 안타까워하고
홍수땐 나무의 존재를 아쉬워한다
윤동주는 '나무'라는 작품에서 '나무가 춤을 추면/바람이 불고,//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라고 노래했다. 과연 나무는 춤을 춘다. 바람이 불어 가지가 움직이는 것이지만 시인은 나무가 흔들리니까 바람이 불고 나무가 멈추니까 바람도 잠잠한 거라고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놓는다. 춤과 잠잠함을 반복하면서도 나무는 가장 오랜 기다림으로 서 있는 존재로 우뚝하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소나무의 기상을 말하고 대나무의 절개를 떠올릴 때, 그들 육체에 깃들인 신성한 기품을 인간의 윤리적, 인격적 자질과 연루시키곤 한다. 그들 안에 흠모할 만한 어떤 속성이나 기운이 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나무가 정신적 고처(高處)를 비유하는 데 알맞고 우리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친숙한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백석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작품에서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라고 노래했다. 그는 오랜 침전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갈매나무'라는 상징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으로 척박한 한 시대를 견뎌냈다. 이 또한 나무라는 상징이 건네주는 독자적 영역인 셈이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아도 자작나무, 팽나무, 감나무, 오동나무, 미루나무, 버드나무, 메타세쿼이아, 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밤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백양나무, 사시나무, 잣나무, 이팝나무, 느릅나무 등, 우리가 문학작품 안에서 배우고 외우면서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던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가?
20세기 초의 미국 시인 킬머의 '나무들'이라는 작품도 떠오르지 않는가? 지난 학기 외국 시를 학생들과 읽어가는 과정에서 만난 시편이다. '나무처럼 사랑스러운 시를/나는 결코 볼 수 없으리라.//감미롭게 흐르는 대지의 가슴에/굶주린 입술을 붙인 채,//하루종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이파리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시는 어리숙한 나도 쓰고 있지만,/나무는 분명 하느님만 지으실 수 있으리라'. 대지와 천상을 이어주는 사랑과 기도의 존재자로서 나무는 충일하다. 이때 나무는 수직의 끝인 뿌리로 굳건하게 서 있고 또 하나의 끝인 이파리로 부드럽게 찰랑거린다. 세월을 따라 낙엽을 떨구고 한겨울을 고독하게 견뎌간다.
모든 생명은 상호연관성으로 존재
생태시스템 구축해 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나무를 통해 배워가고 있다
우리는 산불이 날 때마다 잿더미로 변한 숲을 안타까워하고, 홍수가 날 때도 나무의 존재를 아쉬워한다. 이제 나무는 땔감이나 목재라는 실용성을 넘어 지구라는 별의 가장 위대한 파수꾼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물론 나무는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 사물이지만, 모든 생명은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연관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이 서로 어울려 일종의 생태 시스템을 구축해 간다는 것을 나무를 통해 배워간다. 우리는 나무와 함께 꿈꾸고 거룩한 하늘을 지향하고 생명이라는 궁극적인 표상에 가닿는다. 물론 나무처럼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채 말이다. 우리가 가까운 숲에서 가장 소소한 쉼으로부터 우주적 차원의 네트워크까지 경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