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은 명나라를 천자(天子)의 나라로 사대(事大)했다. 중화를 극진하게 섬김으로써 스스로 소중화의 자긍심에 취했다. 그러니 천자를 대신한 명나라 사신인 천사(天使)를 가볍게 모실 수 없었다. 태종은 최고의 국빈인 천사를 정성을 다해 모시려 서대문 밖에 영빈관인 모화루(慕華樓)를 짓고 영은문(迎恩門)을 세웠다. 천자의 사신이 모화루에 도착하고 떠날 때마다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직접 나아가 절하며 마중하고 배웅했다.
명나라 사신이 모화루 도착 하루 전에 여장을 푼 곳이 있으니 바로 고양의 벽제관이다. 사신단이 모화루에서 본격적인 외교일정을 시작하기 전, 북경을 출발해 의주를 거쳐 남행하는 동안 쌓인 여독을 풀었던 곳이다.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을 세종이 크게 개축했는데, 사신단이 도착하면 조선 왕을 대신해 정1품 관리가 영접했다. 선조가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천병(天兵), 즉 명나라 군사를 위해 제사를 올리라 명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이 쇠퇴하면서 사대의 상징도 쇠락했다. 모화루는 세종 때 모화관으로 격상됐지만, 청일전쟁 후엔 독립협회 사무실로 썼고, 대한제국의 황제를 자처한 고종은 영은문을 허물고 바로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청나라에게 사대할 이유가 사라진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벽제관도 일제 때 원형이 훼손되고, 6·25전쟁 때 소실돼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고양시가 최근 지난 4월부터 실시한 벽제관터 정밀발굴조사 결과를 밝혔다. 벽제관 담장과 건물 유구를 발견했다는데, 시는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벽제관의 원형 정비·복원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거 역사의 유물과 유적 복원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는 현재의 정체성이자 반면교사이다. 흥성(興盛)의 역사에서 자긍심을 깨닫고, 망쇠(亡衰)의 역사에서 경각심을 갖는다.
우리를 향한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패권주의가 도를 넘었다. 국빈 방문한 대통령은 혼밥을 먹고, 수행기자는 폭행을 당했다. 아리랑도 한복도 김치도 자기 문화라 우긴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한미동맹을 강조한 야당 대선주자를 공개적으로 훈계한다.
일제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만큼이나, 사대의 상징 벽제관 복원도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벽제관 복원에 앞서, 벽제관의 역사적 의미를 현재에 어떻게 새길지를 고민해야 한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