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이 개항 100여 년 만에 세계적 수준의 항만으로 성장한 데에는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한 향토하역사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선광, 영진공사, 우련통운이 대표적인데요
이번 주 경인이가 알려주는 인천항이야기는 이들 3개 향토하역사와 관련한 내용으로 준비했습니다.
선광은 인천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 신항에서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을 운영하며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의 약 3분의 1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인천항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선광은 인천 신항을 중심으로 한 컨테이너 하역사업과 평택·군산 지역에서의 항만 하역사업, 중량물 운송사업, 보관물류사업, 사일로사업 등을 하고 있는 규모 있는 향토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IMF에도 사업확장 적극… SICT 개장 이어 신항 운영사 선정도
선광은 1980년대 초반 리비아 진출을 계기로 도약기를 맞았습니다. 리비아 브레가항, 미스라타항, 벵가지항 등에 하역 노무자와 관리직 등 450여 명 규모의 우리나라 직원을 보내 해외 항만 하역작업에 나선 것이죠. 이후 10여 년 동안 건설 기자재 등 하역작업으로 연간 2천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는 등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중량물 운송사업에도 진출했습니다. 현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발전소, 교량 건설 자재 등 대형 설비를 수입해 설치하려는 수요가 많았는데, 선광은 이런 수요를 흡수했습니다. 한강철교 자재와 인천 화력발전소 시설 등도 선광이 운송했다고 합니다.
양곡 수입이 급증하던 1985년엔 인천 내항과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되는 사일로를 건설해 재래식으로 이뤄지던 양곡 하역을 현대화했습니다. 이 사일로는 선광이 안정적 이익을 올리는 탄탄한 기반이자 선광의 상징이 됐습니다.
IMF 외환위기 직후 많은 기업이 다소 소극적 경영 전략을 펼 때 선광은 오히려 적극적이었습니다. 인천항의 고질적 체선 문제 해소를 위해 산업 원자재 종합 처리 항만으로 건설된 인천 북항에 다목적 부두를 건설해 운영하고, 군산과 평택 등 다른 지역 항만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컨테이너 분야로도 사업 영역을 넓혔습니다. 2005년 인천 내항과 인접한 남항에 선광 인천컨테이너터미널(SICT)을 개장한 것이죠. 개장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중국 등과의 급격한 교역량 증가와 선박 대형화는 컨테이너 항만시설의 대형화를 요구했습니다.
1961년 인천의 향토하역사로 출발한 영진공사는 인천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영진공사는 화물 하역부터 운송과 보관에 이르기까지 물류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죠.
인천항 최초로 인천 남항에 민간 투자 부두를 만들어 체선·체화 방지에 이바지하고, 인천 북항 철재부두 주 하역사로 선정돼 세계적 수준의 고객 중심 물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1등 서비스가 아니면 시작하지 않겠다'는 기업 철학으로 21세기 물류 산업을 대표하는 글로벌 종합 물류기업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바레인 진출 통해 사세 키워… 남항에 민간 투자부두도 조성
창업주 고(故) 이기성 전 회장은 동생 고(故) 이기상 전 회장과 함께 1961년 영진공사를 창업했습니다. 당시 수도권 지역 주한 미군의 군수물자가 대부분 인천항으로 반입되던 상황에서, 미군 부대 측 가까운 인사의 소개로 하역업체 문을 열게 됐다고 합니다. 인천기계공고 교사였던 이기성 전 회장이 가족 중에 가장 똑똑해 대표이사를 맡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영진공사는 1972년 정부의 '사채 동결조치'로 경영이 크게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이 조치로 자금을 빌릴 곳이 없게 돼 직원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는 게 당시 직원의 설명입니다.
1977년 바레인 진출은 회사 경영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됐습니다. 중동 진출 모색을 위해 영입한 주한 미군 계약관 출신의 한 인사가 바레인 공항에서 우연히 접한 '바레인 항만 운영사 모집 공고'가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영진공사는 바레인 항만의 화물 하역 사업권을 따내 첨단 항만하역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바레인 공항의 지상조업 계약도 맺었습니다. 영진공사는 걸프전 때도 차질 없이 하역업을 유지하는 등 바레인 정부와 신뢰를 쌓으며 30년 넘게 화물 하역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바레인 진출과 인천항 하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영진공사는 1980년대엔 '인천의 삼성'이라 불릴 정도로 사세가 커졌습니다. 컨테이너 수리업, 해사 채취업, 건설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고, 평택항 등에도 진출했습니다, 한때 상호신용금고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영진공사는 컨테이너 보세장치장 개설(1995년)과 인천 남항 5천t급 선박 접안 가능 물양장 축조(1995년) 등으로 중국과의 수교 이후 대(對)중국 교역 증가에 대비했습니다. 2004년엔 인천 남항 물양장을 1만t급 이상 선박의 접안이 가능하도록 확장하고 이듬해인 2005년엔 저온창고를 신축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영진GLS, 영진로지스틱스, 영진TNM 등 다양한 계열사를 두고 있는 영진공사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종합물류기업으로의 성장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우련통운은 1945년 화물 운송사업을 시작으로 현재는 하역업과 보관, 제3자 물류 등 분야에서 사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련통운의 모태 기업인 '청구양행'은 인천항 인근의 작은 무역 회사로 시작했습니다. 창업주는 고(故) 배인복 전 회장입니다. 초기엔 인천과 중국 상하이 간 육상 운송에 주력했습니다. 당시 인천항은 긴급 구호품과 산업 물품을 조달하는 국가 제1의 수입항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인천항보다 부산항을 중심으로 무역업이 활성화하면서 청구양행은 하역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58년 우련통운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내항 2부두 운영하며 비약적 발전… 소금 제조 등 다각화
1970년대 후반엔 '우련육운'이라는 합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육상 운송사업에도 진출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부두운영회사제(TOC)가 도입되면서 인천 내항 2부두 운영 주체가 된 우련통운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2002년엔 중국 랴오닝(遼寧)성 남부의 항구도시인 잉커우(營口)시 항무국과 힘을 모아 카페리 선사인 범영훼리를 설립, 선박 운송과 컨테이너 하역업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우련통운은 국내 최대 사료부원료 전용 보관창고도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인천북항다목적부두, INTC(인천북항목재부두) 등에 지분 참여를 하고 평택항 부두시설 건설에 참여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습니다.
우련통운은 카페리 컨테이너 하역을 중심으로 평택항 하역, 물류 운송업, 소금 제조업 등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회사 경영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인화단결'이라는 사훈을 중심으로 노사 간 상생을 중시하고, 사람 우선의 경영으로 어려움을 극복해왔습니다.
인천과 인천항은 이들 기업이 존재하고 성장하는 밑바탕이 됐습니다. 이들 향토하역사가 인천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천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인천의 향토하역사들이 인천항과 함께 더욱 발전하길 기대해 봅니다. 지금까지 경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