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을 다투는 사나흘이 지나 완연히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친구라고는 유튜브밖에 없었다. 잠들어 있거나 비몽사몽으로 깨어 있거나 간에 창밖에 무음으로 돌아가는 세상과 연결되는 수단은 휴대폰 유튜브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대통령 선거에 관련된 뉴스들은 아예 관심이 가지 않았다. 딴 세상 얘기 같았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입성했다고 하고,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얘기한 지 불과 몇 달만에 정부가 무너졌다고도 했다. 그런 것들도 '내 세상' 바깥의 일만 같았다. '내'가 지금 당장 살고 죽는데 대통령 선거든 아프가니스탄이든 다 먼 얘기들처럼 들렸던 것이다.
감염후 꼬박 열흘… 죽다 살아났다
바깥에선 대선·탈레반등 역사속 삶
내가 죽는데 병상에선 먼나라 얘기
꿈을 꾸듯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유튜브는 저절로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이경석이라는 문인이 있었다고 했다. 주전파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인조 왕이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하다시피 하다가 끝내 견디기 어려워 세자와 함께 삼십 리를 걸어서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기에 이른다. 그네들은 자기 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써서 비문으로 남길 것을 요구하는데 이때 이 삼전도비를 쓴 사람이 이경석이라고 했다.
여러 신하들이 쓴 글 가운데 그중 이경석이 쓴 글이 과장이 적다고 해서 청나라에 보냈지만 그들이 화를 내면서 글을 고칠 것을 요구한다. 이에 인조가 이경석을 '타일러' 조정의 명운이 달렸으니 문장을 다시 쓸 것을 명하는데, 그렇게 해서 이경석은 역사의 치욕으로 남겨진 비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려서 형에게 글을 배운 이경석은 그 형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글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런 한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고 했다. 나는 병든 침상에 누워 이경석이 형에게 보내는 말을 직접 듣는 것만 같았다. 저 삼전도 비석만큼이나 가파른 벼랑을 등에 지고 사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병상의 유튜브는 나를 또 고려 때 왕 충선왕의 이야기로 데려가기도 했다.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의 외손자이기도 했던 고려 26대 왕인 그는 마흔여섯 살에 당시의 토번, 그러니까 티베트로 유배를 가야 했던 것이다.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그 시대에 그는 한 나라의 왕이면서도 반년이나 걸리는 만오천리 넘어 티베트, 거기서도 포탈라궁의 라싸보다도 먼 '살사결'이라는 곳까지 유배를 갔던 것이었다.
티베트는 참으로 먼 곳이지만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토벌을 갔던 곳이고 통일신라 때 혜초 스님은 티베트도 넘어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와칸 회랑을 지나 인도로 갔었다고도 한다.
꿈결에서인 듯 나는 충선왕의 길을 따라 티베트로도 가고 혜초 스님의 발길 따라 이번에 탈레반이 다시 카불을 점령했다는 아프가니스탄으로도 갔다. 그 옛날에 신라 사람들, 고려 사람들은 단순한 한반도인이 아니요 당나라니 원나라를 지나 티베트로도 가고 인도로도 갔던 국제인들이었다. 그네들의 삶은 뒤얽힌 역사적 수난 때문에 오히려 넓었고 저 대륙의 황무지와 고원을 자신들의 삶의 영역 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돌아간다면 병실 안 허무·밖 역사를
새로만나게 하겠다 어떤 모습이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겨우 나아져 가는 몸으로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한다. 이경석도, 충선왕도, 혜초도 모두 한 사람의 실존적 인간이었으되 동시에 역사를 산 인간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가 이 병상에 묻혀 있는 한 나는 한 실존적 개체로 생사의 고비를 겪고 있으나 저 3층 음압병동 바깥에서 사람들은 대통령 선거가 어떻고 아프가니스탄이 어떻고 태풍이 어떻고 하면서 역사 속의 삶을 만나고 있었다.
돌아간다면, 저 세상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병실에 가득한 '허무'와 병실 바깥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진정으로 새롭게 만나도록 하리라.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나는 진정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숨 가쁜 폐를 끌어안고 나는 또 한 번의 삶이 주어지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