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직접적이다. 대재앙 이후를 말하면서 연극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이다. 왜 대재앙을 막지 못했는지를 묻고 있다. 202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묻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처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일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2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 뭘 했단 말인가.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 무대를 2035년으로 옮겨간 것이다.
연극 '…하늘에서 까만 눈이…'는
2035년 문명 끝을 상상하는 작품
인도 동부에 위치한 자리아에는 불타고 있는 석탄 광산이 있다고 한다. 이 화재는 1916년에 시작되었다.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타고 있는 것이다. 이 불타는 석탄 광산의 이미지는 오늘날 지구가 처한 기후 위기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끊임없이 탄소를 내뿜고 지면의 온도를 끌어올리며 불타고 있는 것은 광산이 아니라 지구 그 자체이다. 그 불길은 석탄이 모두 재로 바뀌기 전에는 도무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검은 재로 덮인 지구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소설이나 영화에서 익히 보고 들은 장면들을 떠올려 봄직하다. 아니다. 연일 보도되고 있는 뉴스를 보면 소설이나 영화를 떠올릴 일이 아니다. 2021년 올해만 하더라도 터키, 그리스, 알제리,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을 강타한 산불에서부터 벨기에,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을 휩쓴 폭우와 홍수에 이르기까지 이상기후에 대한 뉴스는 멈추지 않고 있다. 이상기후는 이제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면적이고 지속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내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시인 이문재는 '어제 죽었다면'이라는 시에서 질문을 바꿔야 다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노래했다. "만일 내가 내일 죽는다면, 말고/ 어제 내가 죽었다면, 으로" 바꿔 상상해보자고 한다. 연극의 물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자리에 근대 문명을 넣어보면 된다. 연극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어제 근대 문명이 멈추었다면, 그렇다면 그 이후를 상상할 수 있겠냐고 바꿔 묻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화석 에너지에 기반하고 있는 근대 문명이 어제 죽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산불·홍수 등 이상기후 진행형인데
문제·원인 해법도 아는데… 외면
만일 근대 문명이 어제 죽었다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질문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원인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사실 산업화 이후 이산화탄소가 얼마나 배출되었으며 지구의 온도가 얼마나 가파르게 올라갔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이성의 결핍이나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과학자, 예술가 그리고 활동가가 숱하게 울린 경종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알고 그 해법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환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발전의 상상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성장주의의 신화에 포획된 채 그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신화가 약속한 풍요롭고 안락한 삶의 리듬에 너무나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경로 의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근대 문명이 어제 죽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연극에서 한 장면을 가져오자면 이렇다. 내일은 "산소 마시러 가는 날"이다. 자연 산소체험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다. 신청한 지 오년만이다. 나무가 만들어내는 자연 산소를 마실 수만 있다면 오년쯤 기다리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오년을 기다려 오초 정도 마신다고 한들 자연 산소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열세 그루밖에 남지 않은 나무가 생산하는 자연 산소를 마실 수만 있다면 족한 것이다. 이런 장면을 원하는가, 연극 밖에서.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