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당구 3쿠션은 '4대 천왕'이 지배한다. 토비욘 브롬달(59·스웨덴), 프레드릭 쿠드롱(52·벨기에), 딕 야스퍼스(56·네덜란드), 다니엘 산체스(47·스페인) 등이다. 지난 20여 년,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등 메이저 이벤트를 번갈아 우승하며 당구계를 평정한 최강 고수들이다.
특히 쿠드롱은 공격적이고 화려한 샷으로 국내에도 팬이 많다. 공이 멈추기도 전에 준비를 마치고 곧바로 샷을 하는 시원함에, 몰아치기에 능하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란 명성에 걸맞게 세계선수권 2차례, 월드컵 17차례 우승했다.
가면을 쓰고 경기를 하는 아마추어 선수 '해커'가 쿠드롱을 세트스코어 3-0으로 물리치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지난 19일 고양시에서 열린 '2021 PBA 챔피언십' 32강전에서다. 경기 내용도 1세트 15-9, 2세트 15-11, 3세트 15-6으로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해커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던 쿠드롱은 충격적인 패배가 믿기지 않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해커는 16강에선 베테랑 김종원을 세트스코어 3-1로 이기고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8강전도 상대 김남수를 3-0으로 가볍게 누르고 4강에 진출했으나 이 대회 우승자인 다비드 마르티네스에 0-4로 아쉽게 패해 질주를 멈췄다. 하지만 아마추어 신분에 초청 선수로 출전해 세계 최강을 꺾은데 이어 4강에 올라 팬심을 흔들었다.
해커는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고수로, 구독자 7만명이 넘는 인기 유튜버이다. 유튜브 '당구 해커'에서 레슨과 이벤트 경기를 한다. '당구 하는 법을 해킹한다'는 의미로 작명했다. 가면은 3년 전 방송을 시작하며 우연히 썼다고 한다.
그의 흰색 가면엔 미묘한 미소와 붉은 볼, 양 끝이 올라간 수염이 그려져 있다. 저항의 상징으로 통하는 '가이 포크스' 가면으로,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한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해커 그룹 '어나니머스'가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해커는 "가면은 당구를 알리는 나만의 방식"이라고 했다. 그의 본명은 안광준(38)으로, 당구장을 운영하는데 지인들은 호기심 유발을 위해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고 한다. 영화에서 가면 쓴 주인공은 전체주의에 맞서는 투사로, 새 세상을 꿈꾼다. 이 가면을 쓴 해커도 당구계를 흔드는 새 바람의 주인공이 됐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