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느리게 걷자'(작사/작곡:장기하) 노랫말 도입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걷자 걷자)/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걷자 걷자)/그렇게 빨리 가다가는(우후후)/죽을 만큼 뛰다가는(우후후)/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우후후)/고양이 한 마리도 못보고 지나치겠네'. 화자는 사람들이 '죽을 만큼' 뛰어다녀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광속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느리게 걷자/걷자' 청유하면서 급변하는 현 시대의 조급성을 질타한다. 때로는 세상사를 잠시 잊고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걸으며 소요하는 것이 즐거울 때가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산려소요는커녕 질주하는 온갖 세상살이에 치이고 시달리고 쪼들리는 병풍상서(病風傷暑)에 봉착할 때가 다반사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화자가 권면하는 '느리게 걷자' 정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험난한 세상에 지친 숨소리는
낙담과 절망의 소리지만
그렇다면 집단 광기의 폭주 속에서 산려소요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인생을 고속기어에서 저속기어로 변환시키는 '다운시프트'를 해야 한다. 즉 빠름이 아닌 느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 느림은 화자가 지적한 것처럼 걷기를 통한 소요에서 시작된다. 요즈음 자고 일어나면 하루아침에 세상은 저만치 변해있다. 그래서 화자는 '사뿐히 지나가는' 어여쁜 고양이 한 마리조차 볼 시간의 여유가 없음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산려소요가 주제어인 곡목 '느리게 걷자'의 가사 중반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점심 때 쯤 슬슬 일어나/가벼운 키스로 하루를 시작하고/양말을 빨아 잘 펴 널어놓고/햇빛 창가에서 차를 마셔보자/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중략).../채찍을 든 도깨비 같은/시뻘건 아저씨가 눈을 부라려도/아 적어도 나는 니게 뭐라 안 해/아 그저 아 잠시 앉았다 다시 가면 돼'. 이 노랫말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저녁형 인간이다. 아침형 인간보다 자유분방하고 모험심이 강하고 창의적인 저녁형이기 때문에 '점심 때 쯤/슬슬' 일어난다. 그는 기상하자마자 '가벼운 키스로 하루'의 일상을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시작한다. 양말을 세탁하여 널어놓은 후에는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에서 차를 마시는 한적한 여유를 만끽한다. 이보다 더 느긋한 삶을 실천하는 모습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워찍허까/워찍해/너무 너무 빨라/나 못 따라가'.
천길 낭떠러지 상황 오더라도
걸으면서 새 희망을 걸어보자
청명한 가을 느리게 걷기 안성맞춤
세상은 '채찍을 든 도깨비 같은/시뻘건 아저씨'로 우글거리는 소굴과 같다. '시뻘건 아저씨'는 괴물의 상징어이다. 따라서 평범한 인간과 대적할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존재이다. 괴물 도깨비는 추월 속도가 워낙 빨라 사람이 따라잡을 수 없는 대상이다. 이렇게 과속하는 도깨비가 활보하는 세상은 충족되지 않은 갈증의 욕망으로 채워진 비정한 곳이다. 무의미한 생각을 버리고 느리게 걷는 산려소요를 실천할 때 도깨비는 결국 설 곳을 잃는다. 아무리 도깨비가 '눈을 부라려도' 괘념할 필요 없다. 일일이 대응할 필요도 없다. 단지 '잠시 앉았다 다시' 걸어가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왕이면 오솔길 소요가 좋지 않을까 싶다. 오솔길 산책은 평화와 고요함 그 자체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신성한 비밀의 문이 열리며 반갑게 손짓하며 기다리고 있을 듯싶다.
아리스토텔레스 '소요학파'의 소요는 소요해야 산려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장자의 소요는 산려해야 소요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소요는 산려와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 지친 숨소리는 낙담과 절망의 숨소리 자체이다. 하지만 천 길 낭떠러지 상황이 오더라도 걸으면서 새 희망을 걸어보자. 따스한 햇살이 아름다운 9월 하순의 청명한 가을이다. 느린 걷기를 통한 산려소요를 실천하기에 안성맞춤인 계절이다.
/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