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듬해인 1895년 여주민란이 일어났다. 아전들이 공전이나 군포를 축내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결세를 정액 이상으로 받은 도결(都結·전결(田結)에 다른 세목을 부가해 부과하는 것)의 문제와 여주목의 향리 윤보길이 퇴임하기 전 저지른 오랜 부정이 그 발단이었다. 농민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관아에 돌입해 감옥을 파괴하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조선 정부는 민란의 배후로 농민 공동체인 여주 농상계(農桑契)를 지목했다. 그 뒤 여주 농민은 수원 농민들과 더불어 동학 북접의 주력군으로 성장했다.
2대 동학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을 마지막까지 모셨던 홍병기(1869~1949)는 세력화된 여주 농민군을 이끌고 충주와 공주 등지에 일본군과 항전하며 본격적인 동학농민전쟁에 나선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나섰던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19년 여주시는 3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최시형의 묘소로 가는 산길을 정비했다. 이천식천(以天食天)으로 생명의 공생과 순환의 이치를 설법하고, 향아설위(向我設位)로 사람 중심의 사상을 펼쳤던 해월 최시형의 정신을 기려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2021년 9월 30일, 여주 세종문화재단에서는 '여주목 청심루 학술대회'를 가졌다. 여주목의 역사적 의미를 묻고, 여주목 관아와 청심루의 문화적 가치를 살피는 자리지만 운동장은 이미 여주목 관아와 청심루의 복원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여주목 관아 터는 이미 여주시청이 이전 계획을 세우고 학교 이전을 추진하는 자리다.
양주시가 양주목 관아를 복원하는 데는 20년이 걸렸으며, 약 160억 원의 예산이 들었다. '사람중심 행복여주'를 외치고 있는 여주시의 의중이 무엇이며, 어떤 선택을 할지 그 향방이 주목된다.
/양동민 지역사회부(여주·양평) 차장 coa007@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