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501000472300024031.jpg
베를리오즈만 아니면 괜찮아요. 그의 '환상교향곡'은 정말 소름 끼쳐요

1991년 조셉 루벤이 감독한 영화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에서 주인공 로라(줄리아 로버츠)는 악몽과도 같았던 남편과 함께한 삶에서 탈출해 새롭게 만난 남성 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된다. 벤은 로맨틱한 저녁을 위해 어떤 음악을 틀면 좋을지를 묻자 로라는 이같이 답한다.

영화 전반부에서 볼 수 있는 결혼 4년 차 부부인 로라와 마틴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행복하다. 그러나 마틴의 병적인 편집증과 의처증으로 인해 로라의 하루하루는 지옥과도 같다. 결국, 죽음을 가장한 탈출에 성공한 로라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벤과 만남을 갖지만, 이내 로라가 죽지 않았음을 눈치챈 마틴이 다시 로라의 삶에 끼어든다.

영화 속에서 마틴이 등장하고 마틴이 로라와 잠자리를 가질 때 배경에 깔리는 음악이 '환상교향곡'이다. 로라에 대한 마틴의 폭력성이 음악으로도 드러난다.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출세작 '환상교향곡' 1830년 파리 초연
한 시대 풍미한 음악 전통 '고전주의' 대체하는 사조 등장 알려
예술가의 사랑·죽음 묘사… 교향곡에 내러티브 구조 첫 시도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1803~1869)의 출세작 '환상교향곡'이 1830년 파리에서 초연됐다. '환상교향곡'의 초연은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 전통(고전주의)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조(낭만주의)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1824년 발표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이후 가장 놀라운 작품으로 꼽히는 '환상교향곡'에서 베를리오즈는 예술가의 사랑과 죽음을 묘사했다. 그가 사용한 전대미문의 다채로운 관현악법과 교향곡에 처음으로 시도한 내러티브(이야기) 구조는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의대생의 길을 걷다가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으며, 끝내 의사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20대 중반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이때 베를리오즈는 유럽 최고의 배우로 주가를 올리던 해리에트 스미드슨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런던 셰익스피어 극단의 파리공연을 본 베를리오즈가 무대에 선 스미드슨에 반했던 거였다. 20대 청년의 어설픈 구애는 결국 실패했고, 베를리오즈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5악장으로 구성된 '환상교향곡'을 작곡했다.

작품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그린 1악장을 시작으로, 무도회에서 다시 마주친 그녀(2악장), 마음을 달래려 산책에 나섰으나 그녀의 모습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3악장으로 중반부까지 구성됐다. 4악장에선 환각에 빠져 그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사형당하며, 5악장은 마녀였던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조장했으며, 비웃는다는 내용이다.

작곡가 탄생 200주년과 서거 150주기에는 '레코딩 붐'
프랑스 지휘자 샤를 뮌시가 보스턴 교향악단을 이끌고 녹음한 음반
70년 가까이 흘렀지만 지금 들어도 사운드의 매력은 여전

 

'환상교향곡'의 완성을 앞두고 베를리오즈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났다. 프랑스 정부가 유망한 젊은 음악가에게 수여하는 '로마 대상'의 1830년 수상자로 베를리오즈를 선정했다. 네 번의 도전 끝에 선정된 베를리오즈는 5년 동안 3천프랑의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환상교향곡'의 초연 이후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진 베를리오즈는 우여곡절 끝에 스미드슨과 1833년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10년 만에 이혼하고 만다. 작품 속에서 죽여버린 사람과 끝까지 사랑하기는 힘들었던 걸까?

작곡가의 탄생 200주년(2003년)과 서거 150주기(2019년)로 인해 21세기 들어서 '환상교향곡' 레코딩 붐이 일었다. 신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연주들이 이성적이고 명석하며, 레코딩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지만, 작품의 제대로 된 극성(劇性)을 표출하는 부분에선 아무래도 이전 세대 거장들의 연주가 앞선다.


2021101501000472300024032.jpg
샤를 뮌시가 보스턴 교향악단을 이끌고 녹음한 '환상교향곡'(1954년)

프랑스 지휘자 샤를 뮌시가 보스턴 교향악단을 이끌고 녹음한 음반(1954년)은 스테레오 도입기에 탄생했다. 70년 가까이 흘렀지만 지금 들어도 사운드의 매력은 여전하다.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연한 곡 해석이 돋보인다. 또한, 뮌시의 파리 오케스트라(1967년) 연주도 수작이다. 프랑스 정부는 야심 차게 출범한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직을 뮌시에게 요청한다. 이에 오랜 기간 맡았던 보스턴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오는데, 이때 녹음한 것이다. 이 밖에 감정 과잉의 이 작품 요소요소를 적절하게 표출해내는 레너드 번스타인과 함께 베를리오즈의 최고 해석가로 명성 높은 콜린 데이비스가 지휘하는 연주로 '환상교향곡'을 접하면 좋을 듯하다. 


/인천본사 문체교육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