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친절한 인천 알리미가 되고 싶은 '경인이'입니다. 오늘 주제는 인천 바다를 둘러싼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소 무거운 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 바로 출발해 보겠습니다.

한국전쟁 전세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연평해전도
인천의 바다는 전쟁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대군을 이끌고 인천 바다를 통해 백제를 침공했습니다. 인천 덕적군도의 하나인 소야도의 이름은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정박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소야도 북악산 기슭에는 소정방이 진을 쳤다는 '담안'이라는 유적이 있습니다.
여몽전쟁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란 때에도 인천은 항상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인천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해 강화도를 점령·약탈한 병인양요(1866년)와 조선과 미군 간 강화도 손돌목 전투로 시작된 신미양요(1871년)가 치러졌던 공간입니다.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 또한 인천이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1950년)은 인천의 팔미도 등대와 주변 섬을 장악하며 시작됐습니다.
정전협정(1953년) 이후 발생한 남북의 첫 해상 교전인 연평해전(1999년)과 제2연평해전(2002년)이 있었고, 2010년엔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가슴이 무거워지는 일들입니다.
해군의 첫 기지 설치된 인천… 미군 선발대에 의해 구성돼
인천은 우리나라 해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입니다. 우리나라 해군은 1945년 11월 손원일 제독이 창설한 해방병단(海防兵團)으로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해군의 첫 기지 역시 인천이었습니다.
인천기지는 미군 선발대에 의해 구성됐습니다. 초대 군사영어학교 교장이었던 리스 미 육군 소령이 월미도의 용궁각을 기지 청사로 정하고 임시로 기지사령관을 맡았다고 합니다. 이후 진해에서 선발된 60명의 해방병단 대원이 인천으로 파견돼 미군으로부터 수리·운전·통신기술 등을 배운 후 인천기지를 정식 인수했습니다. 초대 인천기지사령관은 백진환 정위(현 대위)였습니다.
인천기지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최초의 해군 관함식이 열린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1949년 8월21일 인천 앞바다에선 일본에서 인수한 9척의 함정이 편대 기동훈련을 선보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기함에 탑승해 이를 지켜봤습니다. 정부 관계자와 국회의원, 시민들도 편대 기동훈련을 참관했다고 합니다.

인천기지는 '몽금포 작전'(1949년)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몽금포 작전은 우리나라 군 처음으로 한국전쟁 이전 진행된 대북 작전입니다. 주한 미군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의 전용선을 북에 도둑맞은 것을 응징하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해군은 북한군 기지로 특공대를 보내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하고 1척을 나포했습니다. 또 북한군 12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인천 월미공원엔 몽금포 작전 전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인천기지는 해군이 성장하면서 인천경비부로 승격(1949년)됐고, 인천특정해역사령부를 거쳐 제5해역사령부(1973년), 제2함대사령부(1986년)로 재창설됩니다. 사령부는 경기도 평택으로 기지를 이전(1999년)합니다. 현재 인천 바다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가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의 신순성(1878~1944) 함장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동경고등상선학교에서 4년간 근대식 항해 교육을 받고 갑종 항해사 자격을 땄습니다.
구한말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그를 일본에서 도입한 양무호의 함장으로 임명했고, 신순성 함장은 일본에서 이 배를 이끌고 와 인천항에 닻을 내렸(1903년)습니다. 그는 두 번째 군함인 '광제호' 인수 작업을 맡기도 했습니다.
신순성 선장은 1917년 가족을 이끌고 인천에 정착, 실습선으로 개조된 광제호 선장으로 계속 근무했습니다.
안병구 제독은 한국 해군 1번 잠수함 '장보고함'의 초대 함장을 지낸 인물입니다. 1949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그는 인천중(16회), 제물포고(13회), 해군사관학교(28기)를 나왔습니다. 2005년 전역할 때까지 잠수함 부대의 전대장, 전단장 등 잠수함 부대 지휘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윤영하(1973~2002) 소령은 제2연평해전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윤 소령(당시 대위)은 참수리 357호 정장으로 참전했습니다. 그가 졸업한 송도고등학교엔 흉상이 있습니다. 정부는 그의 희생에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습니다.
남북이 교류해야 할 때마다 인천항은 북한과 통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1984년 우리나라에 큰 수해가 발생했을 때 북한이 인도적 차원에서 보낸 시멘트 등 구호물자 일부가 인천항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정부나 민간단체가 구호물자를 북한으로 보내야 할 때는 인천항에서 배가 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천항은 북한 남포항을 오가는 정기항로가 있었습니다. (주)한성선박이 홍콩에서 3천t급 세미 컨테이너선 '소나호'를 빌려 1998년 8월부터 월 3차례 정기운항했습니다. 이 항로는 남북 당국의 해운사 선정에 대한 입장 차로 2001년 1월 중단됐습니다. 항로 재개는 2001년 4월 이뤄집니다. 국양해운이 용선한 러시아 선적 '미누신스크호(2천360t급)'가 투입됐습니다. 이후 트레이드포춘호(4천500t급)로 배가 바뀌었는데,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에 따른 5·24조치 전까지 남북 경제협력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습니다.
다시 남북 간 정기항로가 개설된다면, 인천항만큼 경쟁력 있는 항만이 없다는 게 항만업계 관계자들의 예상입니다. 인천항과 북한 항만 간 정기항로가 열리는 날이 다시 오길 기대해 봅니다.
지금까지 20차례에 걸쳐 인천항과 인천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렸는데요, 아쉽게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많은 관심과 사랑 감사했습니다. 더 좋은 인천 이야기로 다시 찾아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경인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