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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
서울의 모 장례식장에서 상주 A씨가 모친상을 치르면서 고인이 즐기던 음식을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인근 음식점들에 주문했다가 황망한 경험을 했다. 한 식당에서는 닭볶음탕 1인분을 무료로 제공했으며 다른 분식집 사장은 손수 된장찌개를 싸들고 빈소(殯所)로 찾아와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편지와 조위금까지 전달한 것이다.

지난달 주요 일간신문에 소개된 내용이다. 한 문상객이 상주에게서 전해 들은 미담(美談)을 사회관계망(SNS)에 올린 것이 발단인데 이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거짓말이다", "요즘 이른바 훈훈한 사연으로 '돈쭐'나는 음식점들이 많아서 그걸 노린 마케팅이 아니냐"는 등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돈쭐'이란 '돈'+'혼쭐'의 변형된 신조어로 '혼쭐이 나다'라는 원래 의미와는 달리 정의로운 일을 한 가게의 물건을 팔아주자는 의미이다.

기자 B씨가 해당 음식점들을 찾아 직접 확인한 결과 이 식당 주인들은 상주는 물론 유가족들과도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유족의 애통함을 이용해서 매출을 올리려는 얄팍한 상술도 아니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상주를 위로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사연을 접한 젊은 네티즌들은 "아직 세상은 따뜻한가 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사람의 작은 선행이 주변 사람들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시켜준 것이다. 


사회적 자본 부정적 측면보다 순기능 더 커
한국, 사회자본지수 세계 23위 '고단한 삶'


자본의 종류에는 통상적 의미의 물질적 자본과 인적 자본 그리고 사회적 자본이 있다. 사회적 자본은 아직 개념 정립이 덜 된 상태이나 대체로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신뢰와 사회단체 참여(네트워크), 사회규범, 사회구조 등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통합한 개념으로 물질적 자본, 인적 자본처럼 생산활동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로버트 퍼트남 교수는 사회적 자본을 사회구성원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해 조정과 협동을 촉진하는 규범, 신뢰, 네트워크 등으로 정의했다.

사회적 자본은 집단 내 관계강화를 통해 조장되는 폭력이나 범죄조직 활동, 사회경제적 불평등 확대재생산 등 부정적 측면도 있으나 순기능이 더 크다. 소득수준이 높은 선진국일수록 사회자본도 더 크다. 세계은행의 스티븐 낵과 필립 키퍼는 실증분석을 통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력이 경제성장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회자본지수란 사회의 규범, 신뢰, 네트워크 등 사회적 자본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경쟁력을 수치화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사회자본지수가 높은 나라는 덴마크이고 2위는 노르웨이이며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독일이 그 뒤를 이었다. 세계 최고의 복지천국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세계 17위인데 한국은 세계 23위로 선진국 평균보다 낮았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삶이 고단하다는 방증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기업들의 한국 엑소더스가 갈수록 확대되면서 국내에 안정적인 일자리가 대거 사라진 탓이 크다. 급부상한 주주자본주의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함께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한계상황으로 내몰았는데 디지털혁명은 사회적 자본의 감소를 부채질했다.

지난주부터 코로나19와 불안한 동거 시작
소원했던 공동체 사회 인간관계 복원 시급


코로나19 팬데믹은 설상가상이었다. 전대미문의 괴질은 2019년 12월8일 중국 우한(武 )에서 최초로 확인된 이래 불과 3개월 만에 전 세계 140여 국을 감염시켰다. 코로나19는 인류 역사상 가장 전파가 빠른 전염병으로 기록된다. 도처에서 무더기로 죽어나가면서 지구촌 70억명의 대문 밖 출입이 제한되었다. "보기 싫은 사람 안 봐서 좋다"는 말도 눈길을 끌었다. 덕분에 한국의 대표상권인 서울 명동의 상가 10곳 중 8, 9곳이 문을 닫았다.

지난주부터 국내에서도 코로나19와의 불안한 동거가 개시되었다. 대면산업 회생이 당면과제이나 더 시급한 것은 그동안 소원했던 공동체 사회의 인간관계 복원이다. "간(肝)은 상해도 정(情)은 상해서는 안 된다"는 중국 산둥(山東)상인 정신이 돋보인다.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늦가을의 그윽한 국화꽃 향기 같은 소시민들의 착한 시그널이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