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 음악에 깊게 경도되어서 10년 정도 집중했던 필자에게 '말러 동호회'는 반가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카페 주인이 문만 열어놓고 사정상 활동은 하지 않는 곳이었다. 새롭게 운영진을 꾸렸고, 필자가 운영자로서 2년 정도 동호회를 이끌었다. 운영자의 일 중 하나가 가입 인사하는 회원에게 답글을 다는 거였다. 10명 정도였다가 2년 동안 수백 명 규모로 성장했으니, 적어도 100여개의 가입 인사는 봤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20여 년이 흐른 현재에도 또렷이 생각난다.
전쟁과 폭력에 관한 묘사 등 골고루 담겼다
러시아의 피겨 스케이트 커플이었던 에카테리나 고르디에바와 세르게이 그린코프는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91년 결혼에 성공한 두 사람은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선수권대회도 수차례 석권했다. 그러나 1995년 그린코프가 심장 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년 28세. 고르디에바는 24세였다.
이듬해 고르디에바는 홀로 빙판 위에서 죽은 남편에게 바치는 눈물의 연기를 펼쳤다. 그때 흐른 음악이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아다지에토)이었다.
피겨 스케이트를 좋아한다는 신입 회원은 고르디에바의 연기 때 흐른 음악이 너무 인상적이었고, 말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동호회에 가입했다고 인사했다.
'후기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말러의 음악에는 동화적인 요소, 아름다움과 모성애에 대한 동경, 전쟁과 폭력에 관한 묘사 등이 골고루 담겼다. 세기말의 염세적이며 퇴폐적 풍조와 어우러지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탐미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당대 최고 지휘자 중 한 명이기도 했던 그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에 의한 풍부한 음향과 함께 매우 정제된 실내악적 음향으로 작품의 미묘한 분위기를 극대화 시킨다. 말러의 음악에는 다양한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그만큼 열혈팬들도 많다.
말러의 중기 3부작(교향곡 5~7번)의 첫 작품인 교향곡 5번은 1902년 완성됐다. 1901년 심각한 장출혈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던 말러는 요양을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데 매달렸다. 웬만큼 건강해지자 새로운 작품에 착수했다. 이때 재색을 겸비했으며 19세 연하의 알마 쉰들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말러는 이듬해 알마와 결혼에 성공하며, 이어서 완성한 작품이 교향곡 5번이다. 말러의 작품 중 가장 행복한 시기에 쓰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의 악보에는 '표현력 있게', '영혼을 담아', '진심 어린 감정으로' 등 악상 지시들로 가득하다.
정제된 실내악적 음향으로 분위기 극대화
다양한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그만큼 열혈팬 많아
유명한 트럼펫 솔로에 의한 셋 잇단 음 주제로 이뤄진 장송 행진곡으로 시작하는 교향곡 5번은 마지막 5악장에서 유난히 밝고 힘차게 마무리된다. 5악장으로 나뉘지만, 전체 구조는 1·2악장, 3악장, 4·5악장의 3부로 구성됐다. 전반적으로 1부는 무겁고 절망적이며, 2부는 시골풍의 렌틀러와 도회풍의 왈츠를 교차시켜서 삶의 이중적 면모를 드러낸다. 3부는 유명한 4악장 아다지에토와 밝으면서도 힘찬 5악장이 묶였다. 알마와 결혼으로 인한 행복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1부에 등장했던 절망적 악구들은 5악장에서 희망적 악구들로 해소된다.
앞서 언급한 아다지에토는 선율이 매우 아름다워서 별도로도 많이 연주된다. 현으로만 연주되는 아다지에토는 1963년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의 추도 음악으로 쓰여서 더욱 유명해졌다.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에도 쓰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5월 23일 타계한 금호그룹 박성용 명예회장을 추모하며 그해 6월 초에 내한한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본 공연에 앞서 아다지에토를 연주했다.
루키노 비스콘티가 연출한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년)에도 아다지에토가 쓰였다. 토마스 만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비스콘티는 주인공의 직업을 작가에서 작곡가로 바꿨다. 주인공의 이름(구스타프 아센바흐)과 영화의 주제음악(아다지에토)은 비스콘티가 말러를 염두에 뒀음을 알려준다.
말러의 작품 중 1번과 함께 교향곡 5번은 국내에서도 실연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어떤 연주를 듣더라도 나름의 의미를 알려줬기 때문에 크게 실망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작품의 겉은 시적이면서 낭만적이다. 그러나 작곡가는 내면에 무수한 모티브에 히스테리와 독기, 아이러니를 숨겨놨다. 작품의 내외적 요소들을 잘 추스른 연주로 레너드 번스타인(빈 필하모닉), 리카르도 샤이(로열 콘세르트헤보),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하모닉) 등을 꼽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