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돈 이야기는 남쪽의 임금 숙과 북쪽의 임금 홀이 혼돈의 땅에서 자주 만났는데 혼돈이 잘 대접해주자, 숙과 홀이 혼돈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 하루에 한 개씩 구멍을 뚫어주었더니 칠일 만에 혼돈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영화 '샹치…'를 보다 제강을 만났다
中 혼돈이야기 모티프의 神獸 일종
이 짤막한 이야기에서 숙과 홀은 시간의 신(神)이자 인간의 문명을 상징한다. 반면 혼돈은 시간의 흐름에 적용받지 않는 원시의 도, 무위자연을 상징한다. 그래서 혼돈은 흑백(黑白)이 나눠지지 않고, 선악(善惡)과 피아(彼我)가 구분되지 않고, 시비(是非)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시비가 없다는 것은 시비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 곧 혼돈이 지각이 없는 존재임을 나타낸 것이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지각이 없기에 낯선 이를 환대할 수 있었던 혼돈은 숙과 홀을 만나면서 죽음에 이르고 만다. 숙과 홀의 도움으로 눈, 코, 입, 귀를 가져 지각할 수 있게 된 혼돈은 선악과 피아를 구분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어 더 이상 혼돈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돈의 비극은 우리가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타자를 지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시도일 수 있거니와 비록 선의로 접근하더라도 상대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끌어안으려는 우리의 이해는 실은 타자성의 상실을 강요하는 폭력일 수 있는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타자의 타자성이 상실되고 나면 우리가 함께하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얼굴이지 있는 그대로의 타자일 수 없다. 숙과 홀의 선의(善意)가 혼돈을 죽인 것처럼 우리의 선의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다양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혼돈은 자연의 도(道)를 터득한 사람을 가리키며 자연의 도 그 자체를 인격화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우리가 타자를 대할 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타자를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고, 타자를 배려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혼돈이 죽는 비극은 근대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면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혼돈은 흑백·선악·피아 구분 안돼
보건인력 난입 공동체가 붕괴하듯
선의가 다른이에겐 폭력이 될수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되던 지난해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는 혼돈의 죽음을 연상하는 비극적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외부와 고립된 채로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아마존 원주민 공동체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카야파 부족의 경우 환경 운동가였던 족장 파울린호 파이아칸을 비롯한 수많은 원주민이 코로나19로 사망했으며 문두루쿠 부족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도서관'이라 불리던 10명의 부족 원로들이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자원 채굴이나 밀렵에 따른 이들 공동체의 파괴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방호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보건 인력의 난입으로 붕괴가 가속화된 것이다. 영화 속의 혼돈은 살아남았지만 현실의 혼돈은 죽어가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이 비극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숙과 홀처럼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비극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자유에 대한 희구를 상징하는 붕새의 비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자'는 혼돈의 죽음이라는 슬픈 반전으로 끝난다. 코로나19 시대에 우리 모두 전에 없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혼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비극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