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돈_-_월요논단.jpg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민교협 회원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기실 이는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문구라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들으면 조건반사처럼 테베의 불행한 왕 오이디푸스를 연상하게 된다. 거꾸로 오이디푸스를 얘기할 때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오이디푸스의 미래에 관하여 신탁을 내린 이가 델포이 신전의 주인인 아폴론이기 때문일 성싶다.

너는 과연 너 자신을 알고 있는가.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인간의 얼굴, 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 뱀의 꼬리로 구성된 이종(異種) 스핑크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발이 네 개인데, 두 개가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세 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수수께끼를 맞추지 못한 자는 모두 죽고 말았으나, 오이디푸스만은 답을 알고 있었다. 스핑크스의 물음은 네가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자각하고 있는가의 확인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신전 문구
이말을 들을때면 오이디푸스를 연상


그렇지만 오이디푸스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테베의 오이디푸스 왕이 묻는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자가 누구인가?" 범인을 찾아내어 단죄함으로써 신들의 분노를 가라앉혀야만 그는 창궐한 역병을 제거할 수 있다. 수사관이 범죄자인 자신을 뒤쫓고 있으니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에 대해 무지해도 너무나 무지하였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 신전의 문구가 바로 이 대목에서 겹쳐진다.

오이디푸스를 불행한 신탁의 희생자라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미 정해진 운명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 연민의 근거이다. 그렇지만 희곡 '오이디푸스 왕'의 작가 소포클레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성싶다. 진실을 알고 있는 맹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 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 사이의 팽팽한 긴장 위에서 작품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말미에서 오이디푸스가 하필 제 눈을 후벼 파는 까닭은 이러한 긴장의 해소에 해당한다. 어째서 소포클레스는 '보다'라는 행위에 방점을 찍었던 것일까.

인간의 두 눈은 욕망을 복제하는 기관이다. 두 눈 멀쩡한 이가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까닭은 그 눈이 욕망의 창(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욕망덩어리이며, 인간이 축조해 놓은 세계는 욕망으로 수놓은 장막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한 장막 위에서 오이디푸스는 만인으로부터 칭송을 받는 왕이었으나, 장막이 벗겨진 자리에서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한 패륜아일 따름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의 잘못이라면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이고, 스스로에 가한 징계는 욕망 복제의 창을 송두리째 부숴버리는 행위에 해당한다.

근대인의 운명은 오이디푸스에 비춰서 가늠할 수 있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변별되는 까닭은 언어를 사용하는 '생각의 주체'(subject of thinking)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이에 입각해 있다. 근대인은 생각하는 능력 가운데서도 과학적 이성에 입각하여 근대 세계를 축조해 나갔고, 이는 욕망을 충족시켜 나간 과정과 일치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연 가운데서 출현하였다는 사실을 지워버렸고,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였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다른 생명체와 그렇게나 많이 다른 존재일까.

아버지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 패륜
역병 심각한데 왕놀음 도취된 형국
COP26 결과 실망 오이디푸스 반추


소화, 호흡, 동화, 배설과 같은 대사 작용으로써 생명을 이어나가는 '대사의 주체'(subject of metabolism)라는 관점에서 인간은 세균과 다를 바 없다. 외부 자극을 느끼고 반응하는 '감각의 주체'(subject of sensation)라는 기준으로는 지렁이와 다를 바 없기도 하다. 감각으로 얻은 다양한 자극을 중추신경이나 두뇌에 저장하고서 기억된 경험에 비추어 사태에 대응하는 '지각의 주체'(subject of perception)라는 측면으로 보건대 개나 고양이와도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공통점을 근거로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자식이자 일부임을 깨우쳐야 한다.('생명과 관계 맺음의 주체'에 관한 논의는 최봉영의 '주체와 욕망' 참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6)가 실망스러운 결과를 남기고 폐막하였다. 역병이 심각하게 돌고 있는데도 왕 놀음에 도취되어 욕망의 화려한 장막을 찢지 못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불행한 운명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민교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