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20년대 인천의 문화운동을 살펴보면서 제물포청년회 간부였던 배정국의 존재를 확인하였으면서도 그가 백양당 대표였다는 사실을 지난해에야 확인했으니 지역 연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배정국의 아호 인곡(仁谷)도 인천을 염두에 둔 작명으로 짐작되거니와 그의 서울에서의 활동도 인천에서의 사회활동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배정국의 인천지역에서의 활동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중반에 걸쳐 있다. 그는 1923년 제물포청년회 대표로 활동하는 등 문예운동과 체육보급 운동을 전개했던 주역이었다.
출판사 백양당 대표였던 그의 생애 일부 복원
제물포청년회 활동 등 문예·체육보급 주역
배인국은 인천 서경정(西京町)에 백양당(白楊堂)이라는 양복점을 창업하였으며 기미취인점도 운영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인천에서 제법 양복을 맞도록 지어주는 집'으로 '백양테라(테일러)'를 제일 먼저 거론할 정도로 상당히 이름난 양복점이었다. 1935년 배정국은 일본인 중심의 인천상공회의소에서 이탈하여 조선인 상공인 중심의 단체 결성에 나선다. 그가 인천상공인 대표로 나설 수 있었던 데에는 백양당 양복점 외에 미두(米豆)나 금융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36년께 배정국은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다. 종로2가에 백양당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해방 직후 서점을 열고 출판사도 설립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때까지 출판사업과 문화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했다. 당시 배정국의 인적교류는 상공업계와 문화계를 망라하고 있다. 이태준과 정지용 등의 문장파 문인들과 가장 깊게 교류한 것으로 보이며, 진단학회를 비롯한 국학 연구자들, 골동품 수집가와 서예가들, 조선문학가동맹의 작가들과도 교류했다. 미술사가 근원 김용준, 시인 한용운과도 가까웠다. 인곡이 거주했던 성북동의 '승설암(勝雪 )'은 손재형이나 김환기 등의 당대 서예가와 화가, 문인이 교류하는 문화 공간이었다.
한국전쟁기에 북으로 가 문화활동도 중단
생몰연대 미지수 월북과정 등 정보 거의없어
백양당 출판사의 출판 활동은 1948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위축된다. 이태준과 김남천, 이여성과 임화 등 인곡과 교류했던 조선문학가동맹의 주요 문인들이 월북한데다, 정부수립 이후 공안 기관은 백양당을 좌익의 지하출판 기관으로 지목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되면서 배정국은 정지용, 황순원 등과 함께 문필가 신분으로 가입하였는데 집필금지 원고사전검열 등의 단속 대상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기에 배정국이 북으로 가면서 그의 문화활동도 중단된다.
야나가와 박사의 실증적 연구로 해방공간의 주요 문화인물이었던 배정국의 출판활동, 문장파와 조선문학가동맹 문인들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몰연대는 여전히 미지수이며 월북 과정이나 월북 후의 활동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특히 인천에서의 활동 정보도 단편적이다. 그가 박남칠이나 이승엽 등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인천체육회 임원으로 활동한 사실을 통해 인천에서의 교우와 이념 지향을 짐작할 수 있겠으나,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활동을 지원하고 관련 문인들과 깊숙하게 교류하게 된 계기는 분명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인곡 배정국은 여전히 실종상태인 셈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