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시립화 기념 대축제
과거 부실 사학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던 인천대와 이를 포함한 선인학원을 시립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당시 힘닿는 데까지 설득하고 호소해 시립화에 성공한다. 사진은 1993년 인천대학교 시립화 기념 축제 모습. /인천시 제공

군사 정권에서 급성장한 인천대는 비리사학의 대명사로 불렸다. 예비역 중장 출신인 백인엽(1923~2013)씨가 1958년 사립학교 성광학원을 인수한 뒤 1965년 학원 명칭을 '선인'으로 변경하고 1979년 설립한 인천대는 인천시 남구(현재 미추홀구) 도화동에서 인천공과대학으로 출발했다.

개교 당시 5개 학과에 학생 320명, 교수 9명이었던 이 대학을 시립대학으로 전환(1994년)시킨 이가 바로 최기선(1945~2018) 전 인천시장이다. 인천대는 시립대를 발판삼아 현재는 수도권 거점 국립대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1993년 '시민모임' 면담자리 약속
"지역사회 염원 해결… 변화 다짐"
주변 만류 불구 추진기획단 발족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그의 자서전(최기선 인천 시대를 열다)에서 시장 취임 이후 시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변화가 필요했고, 지역 사회가 염원하던 인천대 문제 해결을 통해 변화를 이끌 것을 다짐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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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 컨벤션센터에서 '고(故) 최기선 인천대 석좌교수(전 인천시장) 흉상제막식'이 열렸다. 2021.11.24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최 전 시장이 인천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은 당시 지역 사회의 요구가 컸던 측면도 있다. 1993년 5월 인천 지역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냈던 김병상 신부, 오경환 신부, 최원식 인하대 교수, 황규록 목사 등으로 구성된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시민 모임'은 최기선 시장을 면담하고 해결 방안 마련을 촉구했다.

면담 자리에서 최 시장은 그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부실 사학인 인천대를 포함한 선인학원 소속 학교 전체를 공립화(시립화)하겠다고 밝혔다.

 

1994년 3월 결실 '재단 역사속으로'
"시민·민주세력 힘모아 가능한 일"


선인학원 내에는 인천대, 인천전문대 등 2개의 대학과 12개의 중·고교가 있었는데 이를 모두 시립화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힘들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최기선 시장은 인천시 내에 '선인학원 시립화 추진기획단'을 발족시키고 곧바로 본격적인 시립화 전환 작업에 착수한다.

14개 학교로 구성된 사립 재단 전체를 시립화하는 것에 대해 교육부도 크게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최기선 시장은 그의 '힘'을 십분 발휘해 정관계 인사를 두루 만나며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실세'의 힘을 아낌없이 발휘해 좌충우돌, 중앙부처 사람들을 만나 압박하고 설득하고 호소했다. 공식적인 루트란 루트는 다 뚫었고 개인적인 친분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기억했다.

김영삼 대통령까지 나서 "적극 지원하라"고 지시했고, 당시 청와대 박관용 비서실장과 김정남 교육문화수석까지 크게 힘을 실어 소관 부처인 교육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최기선 시장이 1993년 6월 본격적으로 시작한 선인학원의 시립화 추진 사업은 1994년 3월 그 결실을 이루게 됐고, 부실사학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던 선인학원의 역사도 끝나게 된다.

최기선 전 시장은 선인학원의 시립화 과정을 "인천 시민들과 민주세력이 힘을 하나로 모아 인천시의 행정을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