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년 전인 1909년 12월22일 이재명을 비롯한 열세 명의 청년들이 모의하여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척살하려 했으나 중상만 입히고 죽이지 못했다.
이날 이완용 척살에 직접 나섰던 이재명(1887~1910)은 평북 선천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1905년 무렵 노동 이민모집에 지원, 하와이로 이주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이준이 분사(憤死)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재명은 일제의 침략 원흉과 조선의 친일파 매국노들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가을 조선으로 돌아왔다.
황상익교수와 단출한 송년모임자리
대뜸 이재명을 아느냐? 고 묻는다
어리둥절 표정에 사건전말을 설명
1909년 이재명은 대한의원 학생 김용문과 오복원의 도움으로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규합하여 매국노 척살 계획을 세웠는데 한때 목표로 정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그해 10월26일 안중근에 의해 처단되자 11월 하순경 이완용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척살하기로 목표를 수정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내 12월22일,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김용문에게서 전해들은 이재명은 거사에 나서 명동 성당 부근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지만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죽이지는 못했다. 이것이 이른바 '총리대신 이완용 모살(謀殺) 미수 사건'으로 일제는 이재명을 비롯한 13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 당시 이 사건의 주모자로 기소된 이들의 이름과 선고 형량은 다음과 같다.
이재명(23세·사형), 김정익(21세·징역 15년), 오복원(25세·징역 10년)·박태은(19세, 징역 7년), 전태선(43세·징역 10년), 이응삼(19세·징역 5년), 김병록(27세·징역 15년), 김용문(21세· 징역 7년), 조창호(25세·징역 15년), 이동수(26세·징역 15년), 이학필(25세·징역 5년), 김병현(21세·징역 5년), 김이걸(27세·징역 5년)
사건 직후 현장에서 일제에 체포된 이재명은 재판장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흉행(兇行)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義行)을 한 것이다. 이 일에 찬성한 사람은 2천만 민족이다. 왜법(倭法)이 불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사형을 선고받은 이재명은 형이 확정된 지 보름 만인 1910년 9월30일 서대문감옥소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셋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이완용(1858~1926)은 일본인 외과의사의 집도로 수술을 받았고 퇴원한 뒤 이듬해(1910년) 8월22일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했다. 그는 68세까지 호의호식하며 살았는데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었던 당시로서는 부귀영화와 함께 장수까지 누린 셈이다.
이완용척살 실패 13명 청년중 한명
안중근은 다 아는데… 이들을 생각
이재명이 처형된 뒤 시신 수습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황상익 선생은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이재명의 시신도 일제가 마음대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추정했다.
안중근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거사에 실패한 이재명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재명과 함께했던 이들의 이름 옆에 열아홉 살, 스물한 살, 스물일곱 살 나이를 적는 마음이 잠시 떨린다. 1999년 11월 서울시가 명동성당 앞에 세운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석'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거든, 스물셋 이재명과 함께 열아홉, 스물 청년들의 얼굴을 떠올릴 일이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