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독일 작가 레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쓴 반전 소설이다. 1차 세계대전은 지옥 같은 참호전으로 악명 높다. 수십m 전진을 위해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킨 탓에 무려 천만여명이 전사했다. 소설의 주인공 파울도 급우들과 함께 참전했지만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들은 전선의 총알받이로 소모된다. 그가 전사한 날 후방의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전황 기록을 남긴다. 단 한 문장의 반전(反轉)으로 완성된 반전(反戰) 주제가 묵직하다.
같은 전쟁터라도 전선과 후방은 천지 차이다. 병사 입장에선 적과 교전하는 전선이 생지옥이라면 후방은 천국일테다. 하지만 전선이 무너지면 후방도 생지옥이 된다. 전선의 장병이 사기를 잃지 않도록 후방의 지원에 물 샐 틈이 없어야 하는 이유이다. 총만 안 들었지 후방도 제 역할 수행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 휴전선이 뻥뻥 뚫리고 있다. 2020년 11월 철책을 뛰어넘은 '점프 귀순' 탈북자가 새해 첫날 같은 경로로 월북했다. 휴전선은 전쟁을 쉬고 있을 뿐 중무장한 남북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계 중인 전선이다. 시나브로 밝혀지는 월북 경위가 기가 막히다. 월북자가 탈북자로 밝혀진 것만 해도 놀라운데, 철책을 넘는 장면이 GOP 내 감시카메라 3대에 다섯 차례나 포착됐는데도 병사들은 눈뜬장님이었다니 말이다. 녹화영상 입력 시간과 촬영시간이 달라 엉뚱한 시간대 영상만 뒤지다가 월북 사실조차 모른 채 귀순자의 행적으로 오인했다니 어처구니없다. 혈세 수천억원을 쏟아부은 감시 장비들을 무용지물로 만든 기강해이가 참담하다.
문제의 22사단은 노크 귀순, 점프 귀순, 헤엄 귀순으로 오명을 쌓아왔다. 지난해 헤엄 귀순자는 7번 국도를 유유히 걸어 내려왔다. 그 바람에 동부전선 22사단은 별들의 무덤이 됐다지만, 강화도 배수로 월북 사건을 상기하면 서부전선이라고 다를까 싶다. 북한 일반 주민들이 이 정도면 북한이 작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번 월북 사건과 관련 현장 지휘자는 상부 보고도 생략한 채 "특이사항 없음"으로 종결했다고 한다. 나사 풀린 전선의 기록 한 줄이 무섭다. 진정한 반전(反戰)은 전선의 안보로만 실현된다. 전방의 전선은 뚫리고 후방의 정부는 종전선언에 집착한다. "휴전선은 이상 없는가?"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