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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나는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는데, 그 전에 다른 학교 사범대학을 3년이나 다녔다. 열 살 먹은 시절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스무 살에 소설을 쓴다는 건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충분히 철이 든 후에 소설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첫 소설을 쓰고 싶었다. 이게 내 첫 소설이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원고를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3년 동안 어울리지도 않게 교육학 책만 들고 다녔다. 사범대학을 그만둔 건 두 가지 이유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첫 번째 이유는 조금 우습지만 먹을 갈기 싫어서였다. 당시 내가 다녔던 학과의 교수님은 명망 있는 서예가였는데 걸핏하면 학생들을 불러 연구실에서 먹을 갈게 했다. 이유를 알 순 없지만 내가 제일 자주 불려갔다. 짧으면 두어 시간, 어떤 날에는 네 시간도 넘게 한자리에 앉아 먹을 갈았다. 사부작사부작 화선지 넘기는 소리와 또 사각사각 벼루 위에서 먹이 움직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연구실 창밖으로 노을이 졌고 잣나무가 흔들렸고 나는 졸았다. 두 번째 이유는 중국어 공부가 싫어서였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는 대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보아도 중국어는 아름답지 않았다. 소리도 그랬고 글자도 그러했다.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언어를 내내 익히고 있는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겁이 더럭 났고 부랴부랴 달력을 넘겨보았다. 서두르면 수학능력시험 원서를 접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사범대 도서관 구석 자리에 앉아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유학 준비를 도와주던 교수님과 조교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대청소를 하다 열어본 상자속에
또 한뭉치 발견된 플로피디스크
'1998년~ 2001년까지 써댄 소설'


그렇게 나는 문예창작학과 학생이 되었다.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이 물었다. "왜 편입을 안 하고?"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뭔데요?" 온통 어리바리했다. 이전 학교에 자퇴서를 내지 않아 이중 학적이 되는 바람에 문제도 생겼다. 한 학기가 다 끝나갈 무렵에야 학교를 찾아갔다. 조교가 한숨을 쉬었다. "말이라도 하지 그랬니? 교수님이 얼마나 마음이 상하신 줄 알아?" 미안해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행정실에 자퇴서를 제출하려면 교수 연구동을 지나쳐야 했다. 나는 몰래 수능 공부를 할 때처럼 교수님과 마주칠까 봐 살금살금 벽에 붙어 겨우 행정실로 갔다. 나는 다시 그 학교를 찾아간 적이 없고 이제는 사범대학 건물이 갈색 벽돌 건물이었는지 흰 칠을 한 건물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아름다운 첫 소설을 쓰는 것에는 실패했다. 부끄럽게도 제목은 기억이 난다. 사범대학이 있는 동네를 배경으로 한 단편이었다. 나는 서둘러 절망했고, 그냥 임용고사를 보거나 유학을 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두 번째로 쓴 단편 역시 우스웠고 두 소설 모두 나에게 남아있지 않다. 실은 오래 가지고 있었다. 핑크색 플로피디스크 안에 말이다. "이젠 정말 버려야할까 봐. 이 오래된 걸 읽어낼 컴퓨터도 없고." 나는 과거와 결별할 생각을 한 여자처럼 제법 비장하게 말했는데, 그걸 미련으로 잘못 읽은 남자친구가 플로피디스크를 읽어낼 수 있는 장치를 가져왔다. 나는 난감해서 "나중에 해볼게"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핑크색 플로피디스크를 버렸다. 사인펜으로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소설'이라고 쓰인 것이었다. 그 2년 동안 나는 아마 열 편쯤의 소설을 썼을 것이다. '고맙지만 사실 그 디스켓들은 버렸어'라고 남자친구에게 고백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헤어진 후였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어쩌면
반짝반짝한 소설 있을까? 설마?


중국어 대신 한국어를 공부하고 먹을 가는 대신 소설을 쓰는 일은 좋았다. 오르락내리락 성조 때문에 목이 아픈 중국어에 비해 한국어는 고요했으며 먹물이 튀어 옷을 버릴 일도 없었다. 이 일들이 새삼 떠오른 건 대청소를 하다 열어본 상자 속에 에구머니나, 플로피디스크들을 또 한 뭉치 발견했기 때문이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소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소설'. 내가 소설가가 된 건 2003년이었으니 나는 참 어지간히도 써댔나 보다. 버릴까 말까 나는 또 고민한다. 그 시절 남자친구가 가져다준 장치 같은 건 어디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저 안에 반짝반짝한 소설이 있을까? 설마 그러려고?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