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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그때도 오늘'(오인하 작, 민준호 연출, 1월8일~2월20일,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2관)은 백 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192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이어지는 백 년의 시간은 네 개의 에피소드로 나뉜다. 1920년대의 경성, 1940년대의 제주, 1980년대의 부산, 그리고 2020년대의 DMZ. 네 개의 에피소드는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네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어를 가지고 있다. 바로 평화가 아닐까. 비록 대사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연극은 평화를 노래하기 위해 제국과 국가의 폭력을 소환한다. 그런데 폭력을 소환하기는 하지만 폭력의 현장에서 조금씩 거리를 둔 채 무대에 가져온다. 폭력의 세기를 지나온 백 년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판단은 관객마다 다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네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밑바탕에 평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모든 싸움 멈추게 하는 그 노래
평화위해 새해엔 상상력 가져볼 만


1920년대의 경성.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가 배경이다. 선후배 사이인 용진과 윤재가 주재소에 갇힌 채 고초를 겪고 있다. 둘의 대화를 통해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제암리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교회 건물에 사람을 가둔 채 불을 지른 일본군의 만행을 보고하고 있다. 만주에 가고 싶다는 용진과 민들레 홀씨가 되고 싶다는 윤재는 무거운 보고 중간중간에 여유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독립하면 그 냉면 좀 먹어 보자"는 말은 끝내 이루지 못한다.

1940년대의 제주. 친구 사이인 윤삼과 사섭은 제주 중산간 지대에 산다. 윤삼은 땅을 처분하고 육지로 가려고 한다. 사섭은 부치던 땅을 빼야 하는 상황이 영 못마땅하다. 친구 사이라도 한 사람은 땅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땅을 부치고 있다. 여기까지라면 우정에 관한 이야기나 소작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 수도 있겠으나 역사의 무게는 1948년으로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토벌대에 의해 중산간 지대가 초토화되고 있었다. "그냥 농사짓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총구 앞에서 그 어디에도 가 닿지 못하고 말았다. 땅을 가진 윤삼이도, 그 땅을 부치던 사섭이도 토벌대에게는 그저 처분의 대상에 불과했다. 한라산에서 해안까지 그렇게 붉게 물들었다.

1980년대의 부산. 87년 민주화 운동이 배경이다. 주호는 삼촌뻘인 해동을 유치장에서 만난다. 유치장의 텔레비전에서는 소위 땡전 뉴스가, 거리에서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들려온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해동은 총상 후유증에 시달린다. 주호는 동지를 팔아 혼자 살아남았다며 자책한다. 그런 주호를 해동이 위로한다. "니 잘못이 아니야. 나라가 잘못 하는 기야."

2020년대의 DMZ. 최전방에서 이병과 병장으로 만난 문석과 은규가 보초를 서고 있다. 사회에서는 친구 사이였지만 군대에서는 선임과 후임으로 정렬된다. 그럼에도 입대한 지 석 달밖에 안 된 문석을 걱정하는 은규. 둘 사이의 대화는 군대 축구에서 시작해서 내전을 멈춘 코트디부아르의 축구 선수 디디에 드록바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최후의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전쟁을 왜 하는 거야?", "왜 이러고 있냐?"라는 물음은 그동안 없던 상상의 세계로 나가게 한다.

지금 우린 평화의 시대 살고 있는지
지난 백년간 겪었던 폭력의 시간
다른 백년에도 반복할 것인지…


"달에서 노래가 나온다면…", 그 노래가 "모든 싸움을 멈추게 하는…" 네 개의 에피소드를 거치며 마침내 도달한 지점이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인가. 평화가 거저 올 리 없다. 거저 올 리 없는 평화를 맞이하기 위해 이 정도의 상상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새해에 꿈꿔볼 만하지 않겠는가. "상상력에 권력을", "금지를 금지한다"라는 구호처럼 1968년 유럽의 학생들이 칠판에 적고 거리로 나섰다는 그러한 전설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과연 어떤 노래가 울려 퍼져야 할까?

연극 '그때도 오늘'은 우리의 시대가 평화의 시대인지 묻고 있다. 지금 우리가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묻고 있다. 지난 백 년의 역사에서 겪었던 그 폭력의 시간을 다른 백 년에도 반복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